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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윤3월 1일 경인 2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문익점의 아들 중용과 최무선의 아들 해산에게 벼슬을 내리다

이거이(李居易)를 파면하여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을 삼고, 하윤(河崙)으로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을, 김사형(金士衡)으로 좌정승(左政丞)을, 이서(李舒)로 우정승(右政丞)을, 조영무(趙英茂)·곽추(郭樞)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이직(李稷)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조박(趙璞)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조호(趙瑚)로 예문관 태학사(藝文館太學士)를 삼고, 문중용(文中庸)을 뽑아서 사헌 감찰(司憲監察)을 삼고, 최해산(崔海山)으로 군기 주부(軍器注簿)를 삼았다. 참찬(參贊) 권근(權近)이 상서하기를,

"고(故) 간의 대부(諫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처음 강남(江南)에 들어가서 목면 종자(木緜種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 진양(晉陽) 촌 집[村舍]에 보내어, 비로소 목면을 짜서 진상(進上)하였으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上下)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익점이 준 것입니다. 백성에게 크게 공덕(功德)이 있는데도 응보(應報)를 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아들 중용(中庸)이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3년을 시묘(侍墓)하고, 이어 어미의 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시묘하고, 상을 마친 뒤에 그대로 진양에 숨었으니, 근근(勤謹)하고 효렴(孝廉)하여 쓸 만한 선비입니다. 고(故)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은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하여 능히 해구(海寇)를 제어하였으니, 실로 국가에 공(功)이 있습니다. 그 아들 해산(海山)도 또한 마땅히 서용(敍用)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99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전사(前史)

○罷李居易西原府院君, 河崙晋山府院君。 以金士衡爲左政丞, 李舒右政丞, 趙英茂郭樞議政府贊成事, 李稷參贊議政府事, 趙璞三司左使, 趙瑚藝文館太學士。 擢文中庸爲司憲監察, 崔海山軍器注簿。 參贊權近上書曰:

故諫議大夫文益漸, 初入江南, 覓木緜種子數枚齎來, 送於晋陽村舍, 始織木緜進上。 是故木緜之興, 始於晋陽。 由此廣布一國, 凡民上下, 皆得以衣之, 是皆益漸之所賜也。 大有功德於民, 而不食其報早逝。 其子中庸遭父喪, 廬墓三年, 仍遭母喪, 又廬於墓三年終制, 仍隱於晋陽, 勤謹孝廉, 可用之士也。 故知門下府事崔茂宣, 始劑火藥, 能制海寇, 實有功於國家。 其子海山, 亦宜敍用。

從之。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99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