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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1월 14일 갑술 3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참찬문하부사 권근이 치도 6조목을 임금에게 권고하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였다.

"지난달 26일에 개독(開讀)한 교지(敎旨)를 엎드려 보건대, 수창궁(壽昌宮)의 실화(失火)로 인하여 여덟 가지 일로써 자책(自責)하고, 바른 말을 들어서 재변(災變)을 없애려고 하시었습니다. 대저 재이(災異)의 발생은 항상 사람의 하는 일로 말미암아서 혹은 일에 먼저 하여 경계를 보이고, 혹은 일에 뒤로 하여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늘 뜻이 그윽하고 멀어서, 진실로 엿보고 헤아리기 어렵사오나, 사람의 일[人事]을 보면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고로 천심이 인군(人君)을 어질게 사랑하여, 견고(譴告)하는 것으로 나타내 보여서 반드시 보호하여 돕고, 온전히 하고 편안하게 하려 하는데, 영명(英明)한 자품(資品)이 있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일지라도, 예전 상례(常例)를 답습하여 진작(振作)하고 분발(奮發)하여 행함이 있지 못하면, 하늘이 비상(非常)한 재얼(災孽)로써 내리어 경고(警告)하여,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하게 하여 행함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곡(桑穀)010) 이 조정(朝庭)에 났는데도 고종(高宗)이 중흥(中興)하였고, 큰 나무[大木]가 뽑히었는데도 주 성왕(周成王)이 대치(大治)를 이루었고, 정(鄭)나라에 화재(火災)가 있었는데도, 자산(子産)이 정사를 닦[修政]으매, 재앙이 다시 생기지 않았고, 근일에 명(明)나라에서 근신전(謹身殿)에 벼락이 쳤으니, 그 변(變)이 극도에 달하였는데, 황제가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법을 지켜서 그 마음을 변치 않았기 때문에, 30여 년 동안 제위(帝位)에 있었고, 70여 세까지 수(壽)를 누리었으니, 이것은 덕(德)을 닦아 재앙을 물리치고, 요괴(妖怪)를 변하여 길상(吉祥)을 만든 효험(效驗)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천성의 영명(英明)함과 학문의 정민(精敏)하심이 근고(近古) 이래의 임금들로서는 그 짝을 볼 수가 없사오니, 크게 행함이 있는 자품으로서 크게 행함이 있는 책임을 당하였사오나, 그 베풀어 조치하심이 종전의 상례(常例)를 편안히 여기시어, 아직도 근세의 궤철(軌轍)을 답습하고 비상한 효과를 보지 못하니, 하늘이 전하를 깨우쳐 돕고, 백성들이 전하에게 주시하고 바라는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기를 기약하였을 뿐이겠습니까? 즉위(卽位)하심을 당하여 겨우 한 달을 지나서 잘못하는 일이 없었을 때에 먼저 재앙과 꾸지람을 내리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전하에게 크게 행함이 있을 것으로 경고한 것이오니, 천심(天心)의 소재(所在)를 소연(昭然)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옵서 매우 자책하여 곧은 말[直言]을 구하시니, 하늘에 응하는 도리를 얻었다 하겠습니다. 신(臣) 근(近)이 감히 한 마음을 정하고 깨끗하게 하여, 마음에 있는 바를 다하여 미치고 어두운 말이나마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여덟 가지 일 중에서 이른바, ‘동작(動作)이 마땅함을 잃어서 자기의 덕(德)이 이지러졌는가’라는 것은 더욱 자책하기를 통절(痛切)히 하는 말이오니, 진실로 능히 이와 같이 수성(修省)하여 동작이 모두 마땅해서 그 덕이 이지러짐이 없게 한다면, 그 나머지 일곱 가지 병은 모두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아직 다른 일은 내버려 두고 오직 이 첫머리 한 절목에 부연(敷衍)하여 진달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감(上鑑)은 재찰(裁察)하소서.

대저 인군(人君)의 동작은 일신(一身)의 언행에 그칠 뿐이 아니고, 모든 명령의 출납과 정치의 시행 조처가 모두 동작입니다. 전하께서 처음부터 경학(經學)에 마음을 두시어 언행을 삼가고 닦으시니, 일신의 동작이 어찌 덕을 잃는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정령(政令)으로 말하면, 하루에 만기(萬機)를 살피시매, 다 마땅함을 얻지 못함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정치가 종전의 상례(常例)를 인습하여 사의(事宜)에 합당하지 못해서, 전하께서 마땅히 힘써 수거(修擧)하여야 할 것 한두 가지 사건을 삼가 진달하여 뒤에 조목조목 열거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굽어살피소서.

첫째는 정성과 효도를 독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옛적에 문왕(文王)이 세자(世子)가 되어 왕계(王季)에게 조알(朝謁)하기를 하루에 세 번씩 하였다 합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 태상왕(太上王)을 받들어 섬김이 정성과 공경이 갖추어 지극하였으니, 효도라고 할 수 있사오나, 문왕이 세 번 조알한 일에 비교하면 미치지 못함이 있습니다. 이제 이미 왕위에 오르셨으매, 만기(萬機)가 지극히 번다하여 날마다 친히 조알하시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오니, 마땅히 매일 세차례씩 신하를 보내어 수라를 드리고 문안하며, 열흘에 한 번씩 친히 나가서 뵈옵되, 법가(法駕)를 갖추지 말고 다만 금위(禁衛)만을 거느려서 간편(簡便)함을 좇으시고, 매사에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에 힘쓰소서. 비록 날마다 정성을 다했더라도 감히 스스로 지극하다 생각지 마시고, 반드시 순(舜)문왕(文王)이 어버이 섬기던 것 같이 하시며, 상왕(上王)을 섬기는 데에도 또한 이 도리를 따르소서.

둘째는 청정(聽政)을 부지런히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인군(人君)이 매일 새벽에 조정에 앉아서 정사를 들었는데, 진(秦)나라 이세(二世)로부터 깊이 궁중(宮中)에 있어 환자(宦者)로 하여금 명령을 전하게 하였고, 수(隋) 양제(煬帝)가 또 닷새에 한 번 조회를 보았으니, 이것이 모두 나라를 망치는 정사입니다. 전조(前朝)의 말년에 이 법을 준용(遵用)하여 닷새에 한 번씩 조회하여, 이것을 아일(衙日)011) 이라고 하였는데, 혹은 궁중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멀리서 조례(朝禮)를 받고, 혹은 예(禮)만 받고 정사는 듣지 아니하며, 혹은 그 예까지 아울러 폐하여,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서, 날로 능이(陵夷)해져서 나라를 잃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은(殷)나라의 감계(鑑戒)입니다. 성조(盛朝)가 개국하매 세 성군(聖君)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이 폐법(弊法)은 오히려 전철(前轍)을 밟고 있사오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던 처음에 그 폐단을 고치고자 하여 아일(衙日)에 정사를 듣는다는 명령을 특별히 내리시었는데, 백사(百司)의 신하들이 예전 규례(規例)가 없다 하여 나와서 품(稟)하는 이가 없어서, 드디어 아름다운 뜻을 마침내 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또한 한스러운 일입니다. 대저 인군(人君)이 궁중에 깊이 있어서 환자(宦者)가 명령을 전하게 되면, 이것은 장차 안과 밖이 막히고 가리어져서, 간특(姦慝)한 일이 방자하게 일어날 시초입니다. 멀리는 진(秦)나라·수(隋)나라의 망한 것과 가까이는 전조(前朝) 말년의 복거지철(覆車之轍)이 영원한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명나라 서울에 입조(入朝)하여 두어 달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문연각(文淵閣) 안에서 수반(隨班)하여, 황제(皇帝)가 매일 새벽에 조정에 나와 앉아 정사를 듣고, 백관들이 일을 아뢰는 예(禮)를 친히 보았습니다. 신이 지금 그 법에 의하여 의주(儀注)를 만들어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이를 시행하소서.

아일(衙日) 새벽마다 주상께서 정전(正殿)에 나와 앉으시면, 백관들이 차례로 반열(班列)을 지어 상의(常儀)와 같이 사배(四拜)하고 나서, 동서(東西)로 상향(相向)하여 나누어 서면, 판각(判閣)이 뜰 가운데로 나아가서 북면(北面)하고 서서 말하기를, ‘각사(各司)에서 일을 아룁니다.’ 하고, 차례로 정승 이하 양부(兩府)의 관원으로서 응당 전(殿)에 오를 자를 인도하여 전상(殿上)에 나아가서 일을 아룁니다. 그리고 나서 전상(殿上)에 나누어 앉고, 각사(各司)가 차례로 각각 계본(啓本)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아 읽어 계문(啓聞)하고, 계본을 도승지(都承旨)에게 주어서 어안(御案)에 올립니다. 각사의 계사(啓事)가 끝나면, 판각이 꿇어앉아서 사뢰기를, ‘계사(啓事)가 끝났습니다.’고 합니다. 도승지가 주상 앞에 나아가서 아뢰면, 주상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시고, 정승 이하가 차례로 인도되어 나갑니다. 각사에서 아뢴 일은, 이미 결단(決斷)된 사목(事目)만을 기록하지 말고, 미결(未決)된 상량(商量)하고 의논할 일은 그 본말(本末)을 갖추어 기록하여 두었다가 주상의 뜻[上旨]을 품(稟)하여, 혹은 즉시 결단하고, 혹은 궁중에 머물러 두어 상량하고 의논하여, 다섯 승지(承旨)가 육전(六典)으로 분장(分掌)해서 주상의 명령을 받아 시행하게 하소서. 비록 아일(衙日)이 아니더라도 주상께서 또한 정전(正殿)에 나와 앉으시고, 무릇 일을 아뢸 자는 모두 친히 품(稟)하게 하고,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명령을 전하게 하지 마시어, 막고 가리는 것을 방지하소서. 무릇 숙배(肅拜)012) 하는 자는, 이른 조회[早朝]이면 전날 저녁에 각각 각문(閣門)에 보고하여, 성명(姓名)을 갖추어 기록하고 계본(啓本)을 써서, 전정(殿庭)으로 인도하여 데리고 나와서 꿇어앉아 읽어 아뢰게 하고, 계본을 바친 연후에, 숙배하는 자가 일시에 예(禮)를 행하게 하소서. 한낮의 조회[午朝]나 저녁 조회[晩朝]이면, 그날에 각문(閣門)에 보고하여 모두 위의 의식과 같이 하여, 하루에 세 차례씩 지나지 말게 하고, 감히 전(前)과 같이 산만하게 절차가 없이 사사로 홀로 나와서 중관(中官)에게 부탁하여, 사사로이 숙배를 통해서 계문(啓聞)을 번거롭게 하여 조정의 의식을 문란하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죄를 주소서.

세째는 조사(朝士)를 접견(接見)하는 것입니다. 군신의 분수가 그 예(禮)는 비록 엄하나, 그 정(情)은 마땅히 친(親)하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인군(人君)이 대신(大臣)을 친근히 하고 조사(朝士)를 접견하여, 하룻 동안에 경(卿)·사(士)·대부(大夫)를 보는 때는 많고, 환관(宦官)·궁첩(宮妾)을 가까이 하는 때가 적기 때문에, 참소(讒訴)와 간사함이 나올 수가 없고, 속이[欺罔]는 것이 생길 수가 없어서, 군신의 도(道)가 서로 믿게 되고, 상하(上下)의 정(情)이 가리어지지 않게 되어, 인군(人君)은 충사(忠邪)의 마음을 살필 수가 있고, 신하는 계옥(啓沃)의 도움을 다할 수가 있었는데, 후세에 인주(人主)가 깊이 궁중에 묻혀 있어 조현(朝見)하는 신하가 허배(虛拜)를 하고 물러가서, 군신간(君臣間)의 정의(情意)가 아득하게 서로 접하지 못하여, 간사한 소인들이 임금을 속이어 우롱하고 가리게 되어, 바깥 조정[外庭]의 잘잘못과 민간의 이해를 캄캄하게 들어 알지 못하고 어지럽고 망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고금(古今)에 통한 근심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항상 정전(正殿)에 나 앉으시어 종일토록 경사(卿士)를 접견하시고, 외임(外任)으로 나가게 되어 하직하는 자나 밖으로부터 와서 조회하는 자가 있으면, 관품(官品)의 귀천(貴賤)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접견(接見)을 허락하시어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맑은 물음[淸問]으로 들으시오면, 여러 신하가 모두 감격(感激)한 마음이 있고, 전하께서 두루 민간의 일을 알 것이오니, 그 이익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네째는 경연에 부지런할 것입니다. 제왕(帝王)의 도(道)는 학문(學問)으로 밝아지고 제왕의 정치는 학문으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자고로 왕자(王者)가 반드시 경연을 베풀어서 성학(聖學)을 강구하는 것이 진실로 이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비록 경연을 베풀었으나, 정강(停講)하는 날이 대개 많았습니다. 전하께서 천성(天性)이 영명(英明)하고 학문(學問)이 정박(精博)하시니, 유신(儒臣)이 진강(進講)함이 어찌 능히 발휘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경연에 납시어 정신을 전일(專一)하게 하여 강구(講究)하시면, 마음 가운데에 의리가 밝게 나타나서, 편안히 있어 행함이 없는 때와 정사를 들어 일이 많은 때보다는 반드시 다름이 있을 것입니다. 성학(聖學)이 어찌 이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진보하지 않겠습니까. 또 진강하는 신하들이 비록 모두 용렬한 선비이오나, 전하께서 배웠다고 일컫는 자들입니다. 날을 윤번(輪番)으로 교대하여 나와서 진퇴(進退)를 기다리다가, 분부가 없으시어 물러간 것이 여러 번이오니, 선비를 높이고 학문을 향하는 뜻이 너무나 가볍지 않습니까? 옛적에 부열(傅說)013) 이 은(殷) 고종(高宗)에게 말하기를, ‘학문은 뜻을 공손히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자(天資)의 고명(高明)함을 믿지 마시고, 유신(儒臣)들의 고루함을 말하지 마시고, 날마다 경연에 납시어서 마음을 비게[虛心]하고 뜻을 공손히[遜志]하여 부지런히 강명(講明)하시어, 감히 하루라도 정지하지 마소서. 다른 연고가 있으시어 정강(停講)하는 날에도 또한 마땅히 강관(講官)을 인견(引見)하시고 면대하여 이르고서 파(罷)하소서.

다섯째는 절의(節義)를 포창(褒彰)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국가를 가진 자는 반드시 절의(節義) 있는 선비를 포창하니, 만세(萬歲)의 강상(綱常)을 굳게 하자는 것입니다. 왕자(王者)가 의(義)를 들[擧]어서 창업(創業)할 때에 자기에게 붙좇는 자는 상을 주고, 붙좇지 않는 자는 죄를 주는 것이 진실로 의당한 일이오나, 대업(大業)이 이미 정하여져서 수성(守成)할 때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전대(前代)에 절의(節義)를 다한 신하를 상주어, 죽은 자는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살아 있는 자는 불러 써서, 아울러 정표(旌表)와 상(賞)을 가하여 후세 인신(人臣)의 절의를 장려하나니, 이것은 고금의 통한 의리입니다. 우리 국가가 운수에 응하여 나라를 열어서, 세 성인(聖人)께서 서로 계승하여 문치(文治)로 태평을 가져왔사오나, 절의를 포상하는 법은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보건대, 전조(前朝)의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본래 한미(寒微)한 선비로 오로지 태상왕의 천발(薦拔)의 은혜를 입어서 대배(大拜)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이 어찌 태상왕께 후히 갚으려고 하지 않았겠으며, 또 재주와 식견의 밝음으로써 어찌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돌아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왕씨(王氏)의 위태하고 망하는 형세를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자기 몸이 보전되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섬기던 곳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생명을 잃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절(大節)에 임(臨)하여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통(韓通)014) 이 주(周)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송(宋) 태조(太祖)가 추증(追贈)하였고, 문천상(文天祥)015) 이 송(宋)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원 세조(世祖)가 또한 추증하였습니다. 정몽주고려(高麗)를 위하여 죽었는데, 오늘에 홀로 추증할 수 없겠습니까.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은 전조(前朝) 때에 사헌 집의(司憲執義)이었는데, 태조(太祖)께서 개국하시던 처음에 추대(推戴)하는 신하가 그와 친한 벗이 많으므로 건의(建義)하는 꾀로 달래었으나, 신하의 절개를 지키고 고집하여 응하지 않았습니다. 명(明)나라에서 표사(表辭)가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장차 우리 나라를 죄주려 하매, 태상왕의 명령을 받고 명나라 서울에 입조(入朝)하여 국문(鞫問)을 당하여 매질의 고통이 몹시 괴로왔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으므로, 황제가 이를 아름답게 여기어 그 죄를 석방하였는데, 뒤에 다른 연고로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그 절의가 또한 높일 만합니다. 이 두 사람은 마땅히 봉증(封贈)을 가하고 자손을 녹용하여 뒷사람을 권해야 합니다. 전 주서(注書) 길재(吉再)는 고절(苦節)이 있는 선비입니다.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에 예전 교의(交誼)를 잊지 않으시고, 또 독실한 효도를 아름답게 여기시어, 상왕(上王)께 사뢰어 벼슬을 제수하셨는데, 길재가 일찍이 위조(僞朝)에 벼슬하였다고 하여 스스로 오늘에 신하노릇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가 시골로 돌아갈 것을 들어주시어서 그 뜻을 이루게 하였으니, 길재의 지키는 바가 비록 중도(中道)에 지나고, 바른 것을 잃었다고는 하지마는, 혁명(革命)한 뒤에 오히려 예전 임금을 위하여 절개를 지키어 능히 작록(爵祿)을 사양한 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입니다. 어찌 높은 선비[高士]가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다시 예(禮)로써 불러 작명(爵命)을 더하시고, 굳이 전의 뜻[前志]을 지키어 오지 않는다면, 곧 그 고을로 하여금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復戶]하게 하여, 성조(盛朝)에서 절의(節義)를 포상(褒賞)하는 법을 빛내게 하소서.

여섯째는 여제(厲祭)를 행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무릇 백성에게 공(功)이 있거나, 죽음으로써 일에 부지런히 한 사람은 제사를 지내[致祭]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제사가 없는 귀신도 또한 태려(泰厲)∙국려(國厲)의 법이 있습니다. 지금 홍무예제(洪武禮制)에 그 법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국가의 조례(朝禮)와 제례(祭禮)가 모두 명(明)나라 법을 따르고 있사온데, 오직 이 여제(厲祭) 한 가지 일만이 거행되지 않사오니,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어찌 원통하고 억울함을 안고 혹은 분한(憤恨)을 품어서 마음속에 맺히어 흩어지지 않고, 배를 주리어 먹기를 구하는 자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족히 원기(怨氣)가 쌓여 질역(疾疫)이 생기고, 화기(和氣)를 상하여 변괴(變怪)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또 예조(禮曹)로 하여금 전조(前朝) 이후 우리 국초(國初)까지 공이 있어 제사할 만한 사람을 추록(追錄)하여 치제(致祭)하는 법을 상정(詳定)하게 하고,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백성에게 사랑을 남긴 자도 또한 그 고을에서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을 들어주고, 모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귀신의 여제(厲祭)의 법은 일체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위에 든 두어 가지 일은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온데, 전하께서는 영명과단(英明果斷)하신 불세출(不世出)의 임금으로서 도리어 전대(前代)의 인습한 폐단을 따르고, 이를 개혁하여 시행하지 못하시면 되겠습니까. 만일 전하께서 하지 못하신다면, 이것은 영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가석(可惜)한 일이 아닙니까. 또 이 두어 가지 일은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아니고, 행하면 몹시 유익하여, 여덟 가지 일의 병과 만기(萬機)의 정사가 하나도 그 도(道)를 얻지 못함이 없어서, 인심을 감화(感化)시킬 수 있고, 천의(天意)를 감동시킬 수 있으며 화기(和氣)를 부를 수 있고, 재변(災變)을 없앨 수 있으며, 지극한 다스림[至治]을 일으킬 수 있고, 큰 복[景祚]을 연장할 수 있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단연(斷然)히 행하시어 만세(萬世)를 대행(大幸)케 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91면
  • 【분류】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윤리(倫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註 010]
    상곡(桑穀) : 뽕나무와 닥나무.
  • [註 011]
    아일(衙日) : 조회를 열어 문무 백관들로부터 정사(政事)를 듣는 날.
  • [註 012]
    숙배(肅拜) : 벼슬을 제수(除授) 받은 자가 서울을 떠나 임지(任地)로 가기 전에 임금에게 작별을 아뢰는 일.
  • [註 013]
    부열(傅說) :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현상(賢相).
  • [註 014]
    한통(韓通) : 후주(後周) 무인(武人).
  • [註 015]
    문천상(文天祥) : 남송(南宋) 말의 충신(忠臣).

○參贊門下府事權近上書。 書曰:

伏覩去月二十六日開讀敎旨, 爲因壽昌宮失火, 以八事自責, 欲聞讜言, 以消災變。 夫災異之興, 恒由人作, 或先事而示警, 或後事而降罰。 天意幽遠, 固難窺測, 然觀人事, 可以推知。 自古天心, 仁愛人君, 彰示譴告, 必欲保佑而全安之。 其有英明之資, 可以有爲之主, 循襲故常, 不肯振奮有爲, 則天必降以非常之孼以警告之, 使之恐懼修省以有爲也。 故桑、穀生朝, 而高宗中興; 大木斯拔, 而周成以治; 有火災, 子産修政, 災不復生。 近日, 大明雷震謹身殿, 其變極矣, 而帝勤謹守法, 不貳其心, 故能在位三十餘年, 享壽七十餘歲。 此修德弭災, 變妖爲吉之效也。 惟我主上殿下, 天性之英明, 學問之精敏, 近古以來時君世主, 罕見其匹。 以大有爲之資, 當大有爲之任, 然其施措安於故常, 尙循近世之轍, 未見非常之效。 天之啓佑, 民之注望於殿下者, 豈期止此而已哉! 當卽位甫閱一月, 未有過擧之時, 先降災咎, 此必所以警告殿下以大有爲, 天心所在, 昭然可知。 殿下痛自刻責, 以求直言, 應天之道, 可謂得矣。 臣敢不精白一心, 罄竭底蘊, 以陳狂瞽之言! 臣觀八事, 所謂動作失當, 而己德虧者, 尤吾自責痛切之辭。 苟能如此修省, 使動作皆當, 而厥德無虧, 則其餘七事之病, 皆勿藥而自愈矣。 故臣姑置他事, 唯卽此首一節而敷陳之, 伏惟上鑑裁察焉。 夫人君動作, 非止一身言行而已, 凡命令之出納, 政治之施措, 皆動作也。 殿下自初留神經學, 愼修言行, 一身動作, 豈有失德? 若以政令言之, 則一日萬機, 安知其有未盡得宜者乎? 謹陳政治因循故常, 未盡合宜, 殿下所當勉力修擧者一二事件, 條列于後, 伏望垂察焉。 一曰篤誠孝。 臣聞昔者文王之爲世子, 朝於王季日三。 殿下嘗在東宮, 奉事太上, 誠敬備至, 可謂孝矣。 然視文王三朝之事, 有不逮焉。 今旣卽尊, 萬機至繁, 日日親朝, 誠所難爲。 宜於每日, 三次遣臣, 致膳問安, 每旬一次親詣覲省, 不須備法駕, 但率禁衛, 以從簡便。 每事必竭誠敬, 務悅其心, 雖日盡誠, 不敢自以爲至, 必欲如文王之事親。 其事上王, 亦循是道。 二曰勤聽政。 古者人君, 每日昧爽, 坐朝聽政, 自 二世, 深居宮中, 令宦者傳命, 煬帝又爲五日一視朝, 此皆亡國之政也。 前朝之季, 遵用是法, 五日一朝, 謂之衙日。 或居中不出, 遙受朝禮, 或受禮而不聽政, 或幷與其禮而廢之, 徒有其名而無其實, 日就陵夷, 以至失國, 此鑑也。 盛朝開國, 三聖繼作, 而此弊法尙循舊轍, 誠可恨也。 殿下卽位之初, 欲革其弊, 特下衙日聽朝之命, 百司之臣, 以無舊規, 莫能進稟, 遂使美意, 竟以不行, 亦可恨也。 夫人主深居宮中, 宦寺傳命, 是將內外擁蔽, 姦慝肆行之漸也。 遠則之亡, 近則前朝之季, 覆車之轍, 可爲永戒。 臣嘗入朝京師, 淹留數月, 隨班文淵閣中, 親見皇帝每日昧爽, 坐朝聽政, 百官奏事之禮。 臣今請依其法, 撰進儀注, 伏望殿下擧而行之。 每衙日昧爽, 上出坐正殿, 百官以次排班如常儀, 四拜訖, 東西相向分立。 判閣就庭中心, 北面立曰: "各司啓事。" 次引政丞以下兩府應陞殿者, 就殿上啓事訖, 殿上分坐。 各司以次, 各將啓本就前, 跪讀啓聞, 以啓本授都承旨, 進呈御案。 各司啓訖, 判閣跪白啓事畢, 都承旨進啓上前, 上起入內。 政丞以下, 以次引出。 其各司所啓之事, 毋令只錄已決事目, 必將未決擬議之事, 備錄本末, 進稟上旨, 或卽斷, 或留中擬議, 五承旨以《六典》分掌, 稟受施行。 雖非衙日, 上亦出坐正殿, 凡啓事者, 皆令親稟, 毋使中官傳命, 以防擁蔽。 凡肅拜者, 早朝則前夕, 各報閣門, 具錄姓名, 開寫啓本, 引就殿庭, 跪讀啓訖, 進呈然後, 肅拜者一時行禮。 午朝晩朝則其日報閣門, 竝如上儀, 一日不過三次。 毋敢似前漫無節次, 私自獨進, 依附中官, 私通肅拜, 以煩啓聞, 以紊朝儀, 違者罪之。 三曰接朝士。 君臣之分, 其禮雖嚴, 其情當親。 古者人君, 親近大臣, 接見朝士, 一日之內, 見卿士大夫之時多, 而親宦官宮妾之時少, 故讒邪無自而進, 欺罔無自而生, 君臣之道交孚, 上下之情不蔽, 人主得察忠邪之心, 人臣得盡啓沃之益。 後世人主, 深居宮中, 朝見之臣, 虛拜而退, 君臣情意, 邈不相接, 以致憸邪罔上, 愚弄蒙蔽, 外庭得失, 民間利害, 懜不聞知, 以至亂亡, 此古今之通患也。 願自今, 常坐正殿, 終日接見卿士, 其有出外辭行者, 自外來朝者, 無論官品貴賤, 皆賜接見, 溫言以慰, 淸問以聽, 則群臣皆有感激之心, 殿下周知民間之事, 其益豈不弘哉! 四曰勤經筵。 帝王之道, 由學而明; 帝王之治, 由學而廣。 自古王者, 必設經筵, 以講聖學, 良以此也。 殿下卽位以來, 雖設經筵, 停講之日, 蓋亦多矣。 殿下天性英明, 學問精博, 儒臣進講, 豈能有所發揮者哉? 然而殿下御於經筵, 凝神講究, 方寸之天, 義理昭著, 必有異於燕居無爲之時, 聽政多務之際者矣。 聖學豈不由是而益進哉! 且進講之臣, 雖皆庸儒, 然殿下所號學焉者也, 輪日更進, 以候進止, 不報而退者屢矣, 崇儒嚮學之意, 不已輕乎? 昔傅說高宗曰: "惟學遜志。" 伏望殿下, 毋恃天資之明, 毋謂儒臣之陋, 日御經筵, 虛心遜志, 孜孜講明, 毋敢一日或輟, 其有他故停講之日, 亦宜引見講官, 面諭而罷。 五曰褒節義。 自古有國家者, 必褒節義之士, 所以固萬世之綱常也。 王者擧義創業之時, 人之附我者賞之, 不附者罪之, 固其宜也。 及大業旣定, 守成之時, 則必賞盡節前代之臣, 亡者追贈, 存者徵用, 竝加旌賞, 以勵後世人臣之節, 此古今之通義也。 惟我國家, 應運開國, 三聖相承, 文致太平, 而褒賞節義之典, 尙未擧行, 庸非闕歟! 竊見前朝侍中鄭夢周, 本以寒儒, 專蒙太上王薦拔之恩, 以至大拜, 其心豈不欲厚報於太上! 且以才識之明, 豈不知天命人心之所歸, 豈不知王氏危亡之勢, 豈不知其身之不保! 然猶專心所事, 不貳其操, 以至殞命, 是所謂臨大節而不可奪者也。 韓通死於, 而 太祖追贈之, 文天祥死於, 而 世祖亦追贈之。 夢周死於高麗, 獨不可追贈於今日乎? 光山君 金若恒, 在前朝爲司憲執義。 當太祖開國之初, 推戴之臣, 多其親友, 誘以建義之謀, 乃守臣節, 固執不應。 及皇假以表辭不恭, 將罪我國, 受太上王命, 入朝京師, 被其鞫問, 榜掠甚苦, 終不屈服, 帝用嘉之, 以釋其罪。 後以他故, 竟不得還, 是其節義, 亦可尙也。 此二人者, 宜加封贈, 錄其子孫, 以勵後人。 前注書吉再, 苦節之士。 殿下在東宮, 不忘舊要, 且嘉篤孝, 白於上王, 授以爵命, 乃自以嘗仕僞朝, 不欲臣於今日, 殿下聽還鄕里, 使遂其志。 之所守, 雖曰過中失正, 然在革命之後, 尙爲舊君守節, 能辭爵祿者, 惟此一人而已, 豈非高士哉! 宜更禮召, 以加爵命, 苟守前志, 尙不克來, 卽令其州, 旌門復戶, 以光盛朝褒賞節義之典。 六曰行厲祭。 自古凡有功於民及以死勤事之人, 無不致祭, 無祀之鬼, 亦有泰厲國厲之法。 今《洪武禮制》, 其法甚備。 我國家朝祭之禮, 皆遵皇之法, 惟此厲祭一事, 獨不擧行, 冥冥之中, 豈無或抱冤抑, 或懷憤恨, 結而不散, 餒而求食者乎? 此足以積怨氣而生疾疫, 傷和氣而致變怪者也。 且令禮曹, 追錄前朝以後至于國初, 有功可祀之人, 詳定致祭之法, 州郡守令有遺愛者, 亦聽其州立祀以祭, 凡無祀之鬼、厲祭之法, 一依《洪武禮制》施行。 右件數事, 非有高遠難行之事, 乃以殿下英明果斷不世出之主, 而反循前代因襲之弊, 不能修擧而行之可乎? 苟在殿下而不爲, 是永無可爲之時矣。 豈不甚可惜哉! 且此數事, 爲之非甚難, 而行之甚有益。 八事之病, 萬機之政, 無一不得其道, 可以感人心, 可以格天意, 可以召和氣, 可以消災變, 可以興至治, 可以延景祚。 伏望殿下斷然行之, 以幸萬世。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9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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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윤리(倫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