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三省)에서 방간을 복주하기를 청하다. 박포를 국문하고, 연루자를 모두 처벌하다
삼성(三省)이 교장(交章)하여 방간을 복주(伏誅)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와 더불어 교좌(交坐)하여 박포(朴苞)를 국문하게 하니, 박포가 말하였다.
"지난해 동짓날 방간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었는데, 그날 마침 비가 왔으므로, 고하기를, ‘시령(時令)이 온화하지 못하니 마땅히 조심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23일 해질녘에 천기(天氣)가 서북쪽으로 붉었으므로, 이튿날 또 방간의 집에 가서 고하기를, ‘하늘에 요기(妖氣)가 있으니, 삼가서 처신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더니, 방간이 말하기를, ‘어떻게 처신할꼬?’ 하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군사를 맡지 말고 출입을 삼가며,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행동거지를 무겁게 하기를 고려 때의 제왕(諸王)의 예(例)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고 하였습니다. 방간이 그 다음을 묻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만형(蠻荊)013) 으로 들어가기를 태백(太伯)014) ·중옹(仲雍)015) 과 같이 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다음을 묻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정안공은 군사가 강하고 중인(衆人)이 붙쫓으며, 또 상당후(上黨侯)의 아우016) 로 사위를 삼았는데, 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하기가 아침이슬과 같으니, 먼저 쳐서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박포에게 장(杖)을 때리고, 그 날조하여 선동한 이유를 물으니, 박포가 말하였다.
"내가 비록 정안공을 따라서 함께 정사(定社)의 공을 이루었으나, 얼마 아니되어 나를 외방으로 폄척(貶斥)하였으니, 지금 비록 써 주더라도 어찌 보증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방간에게 공을 세우면, 더불어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三省)에서 상소(上疏)하였다.
"임금의 지친(至親)에게는 장래가 없으니, 장래가 있으면 반드시 베는 것입니다. 이것은 《춘추(春秋)》의 큰 법입니다. 지금 방간이 동복 아우인 지친으로서 종실(宗室) 번병(藩屛)이 되어, 전하께서 심복(心腹)으로 여기고 군사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방간이 진실로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왕실을 보필할 것인데, 이것은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 어모(禦侮)의 부탁을 상은(傷恩)하는 데 썼으니, 만일 급히 응변(應變)하지 않았다면, 불측한 변(變)이 있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마땅히 방간을 법대로 처치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다만 사제(私第)에 안치(安置)하게 하시니, 이것이 비록 전하의 우애의 뜻이나, 그것이 종사(宗社) 대계에 어찌되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는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큰 법을 바로잡으소서. 옛부터 난신(亂臣) 적자(賊子)는 반드시 당여(黨與)가 있는 것이니, 오늘의 변(變)이 어찌 주모하여 난을 선동한 자가 없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사(攸司)에 명령을 내려 연루된 자 가운데 주모자를 국문하게 하고, 그 죄를 밝게 바루어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임금이 소를 보고서 통곡하여 울었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이침(李忱)이 망명하였다가 스스로 옥으로 나왔다. 삼성(三省)이 연복사(演福寺)에 모였는데, 삼성의 장무(掌務)를 불러서 선지(宣旨)하였다.
"어제 삼성(三省)에서 올린 소(疏)가 비록 법에 합하나, 내가 어찌 차마 골육지친(骨肉之親)을 형륙(刑戮)에 처하겠는가? 지금 들으니, 삼성이 함께 모였다 하니, 이 일을 다시 청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연(未然)에 금지하니, 모두 그리 알라!"
장무(掌務)가 아뢰었다.
"방간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 골육을 해치려고 하므로, 주상께서 처음에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금하였는데 듣지 않고, 또 이지실(李之實)을 보내어 금하였는데도 또한 좇지 않고, 군사를 발(發)하기에 이르렀으니, 죄가 더 막중합니다. 마땅히 큰 법에 처해야 합니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내가 차라리 해를 당할지언정, 어찌 차마 동모제(同母弟)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겠는가?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박포는 관직을 삭탈하여 장 1백 대에 청해(靑海)로 귀양보내고, 박만(朴蔓)·이옥(李沃)은 변방 고을에 귀양보냈다. 삼성에서 방간의 당여(黨與)의 죄상의 경중(輕重)을 갖추어 아뢰니, 명령을 내리었다.
"박포는 이제 벌써 삭직하여 장형(杖刑)에 처하여 귀양보냈고, 또 양차(兩次)의 공신이니, 다시 극형을 가할 수는 없다. 다만 가사(家舍)를 적몰(籍沒)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게 하라. 전 소윤(少尹) 민원공(閔原功)은 큰 말을 하였으니 율에 의하여 처참(處斬)하고,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용소(崔龍蘇)는 삭직하여 장(杖) 60대에 처하고, 중추원 사(中樞院使) 이침(李忱)·전 판사(判事) 환유(桓愉)·전 전서(典書) 설숭(薛崇)은 각각 태(苔) 50대에 처하고, 호군(護軍) 원윤(元胤)은 장 60대에 처하고, 박인길(朴寅吉)·곽범(郭凡)·김보해(金寶海)는 각각 장 70대에 처하여 아울러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고, 내관(內官) 강인부(姜仁富)·원윤(元尹) 이백온(李伯溫)·전 전서(典書) 임천년(任天年)·우군 장군(右軍將軍) 김간(金旰), 장군(將軍) 이난(李蘭)·이거현(李巨賢)·황재(黃載), 전 전중 경(殿中卿) 강승평(姜昇平)·선략 장군(宣略將軍) 이윤량(李允良)은 아울러 외방에 부처(付處)하고, 또 도망 중에 있는 오용권(吳用權)·곽승우(郭承祐)·민공생(閔公生)·민도생(閔道生)·정승길(鄭承吉)·정윤(鄭倫)·김월하(金月下)·김귀남(金貴南)·민교(閔校)·이군필(李君弼)·김국진(金國珍)은 나누어 원방에 유배(流配)하되, 그 자현(自現)하는 것을 들어주어 각각 배소(配所)에 이르게 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장담(張湛)은 양차(兩次)의 공신이므로 다만 파직만 시키고, 승지(承旨) 조경(趙卿)은 당여(黨與)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죄를 방면하게 하라."
강유신(康有信)·장사미(張思美)·이군실(李君實)·정승길(鄭升吉)은 모두 방간에게 힘을 다한 자들인데, 정안공이 즉위한 뒤에 모두 임용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4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司法) / 역사(歷史)
- [註 013]만형(蠻荊) : 옛날 한족(漢族)의 문명(文明)을 받지 못한 야만족(野蠻族)이 살던 양자강(楊子江)이남의 땅.
- [註 014]
태백(太伯) :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 나라를 동생 계력(季歷)에게 사양하고 만형(蠻荊)으로 들어갔음.- [註 015]
중옹(仲雍) :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차자(次子). 형 태백(太伯)과 같이 만형(蠻荊)으로 들어갔음.- [註 016]
상당후(上黨侯)의 아우 : 상당후 이저(李佇:뒤의 이백경(李伯卿)의 아우 이백강(李伯剛)을 말하는데, 그는 태종(太宗)의 맏딸 정순 공주(貞順公主)와 결혼하였음.○三省交章請誅芳幹, 上命河崙與臺諫刑曹交坐, 鞫問朴苞。 苞云: "去年冬至, 抵芳幹第爲博戲, 是日適有雨, 告之曰: ‘時令不和, 宜愼之。’ 至今年正月二十三日初昏, 天氣赤於西北, 明日又至芳幹第告曰: ‘天有妖氣, 宜愼處之。’ 芳幹曰: ‘何以處之?’ 苞曰: ‘不典兵謹出入, 整衣冠重行止, 如前朝諸王之例, 斯乃上策。’ 芳幹問其次, 苞曰: ‘逃入蠻荊, 如太伯、仲雍, 其次也。’ 又問其次, 苞曰: ‘靖安公兵强衆附, 且以上黨之弟爲壻。 公之兵弱, 危若朝露, 不如先擊以去之。’" 於是杖苞, 問其構煽之由, 苞曰: "我雖從靖安公, 共成定社之功, 然未幾貶我於外。 今雖用苞, 豈可保哉? 若立功於芳幹, 則可與長享富貴也。" 三省上疏曰:
君親無將, 將而必誅, 此《春秋》之大法也。 今芳幹以母弟至親, 爲宗室藩屛, 殿下以爲心腹, 授之兵柄。 芳幹誠宜盡忠竭力, 扶輔王室, 不此之顧, 私動軍兵, 以禦侮之寄, 爲傷恩之用。 儻不應卒, 則安知有不測之變哉? 宜將芳幹, 置之於法, 殿下只令安置私第。 此雖殿下友愛之意, 其於宗社大計何? 願殿下斷以大義, 以正大法。 自古亂臣賊子, 必有儻與, 今日之變, 豈無主謀而煽亂者乎? 伏望下令攸司, 將其連涉, 鞫問主謀者, 明正其罪, 以慰衆心。
上覽之慟泣。 中樞院副使李忱亡命, 自詣于獄。 三省會於演福寺, 召三省掌務, 宣旨曰: "昨日三省所上, 雖合於法, 予豈忍以骨肉之親, 置於刑戮哉? 今聞三省一會, 意其更請, 此事禁於未然, 其悉知之。" 掌務啓曰: "芳幹私自動兵, 欲害骨肉, 上初遣都承旨禁之, 不聽, 又遣李之實禁之, 亦不從, 以至發兵, 罪莫重焉, 宜置大法。" 上又諭之曰: "我寧被害, 豈忍使同母弟就戮哉? 更勿擧論。"
削朴苞職, 杖一百, 流之靑海; 流朴蔓、李沃于邊郡。 三省具芳幹儻與罪狀輕重以聞, 下旨曰:
朴苞, 今已削職杖流矣。 且兩度功臣, 不宜更加極刑, 只令籍沒家舍, 禁錮子孫。 前少尹閔原功說大語, 依律處斬; 檢校參贊門下府事崔龍蘇, 削職杖六十; 中樞院使李忱、前判事桓愉、前典書薛崇, 各笞五十; 護軍元胤, 杖六十; 朴寅吉、郭凡、金寶海, 各杖七十, 竝於遠方付處。 內官姜仁富、元尹伯溫、前典書任天年、右軍將軍金旰、將軍李蘭ㆍ李巨賢ㆍ黃載、前殿中卿姜昇平、宣略將軍李允良, 竝外方付處。 又將在逃吳用權、郭承祐、閔公生、閔道生、鄭承吉、鄭倫、金月下、金貴南、閔校、李君弼、金國珍, 分流遠方, 聽其自現, 各至貶所。 同知中樞院事張湛, 兩度功臣, 只令罷職; 承旨趙卿, 不干儻與, 特令放罪。
康有信、張思美、李君實、鄭升吉, 皆盡力於芳幹者也, 及公卽位, 皆任用焉。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4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司法) / 역사(歷史)
- [註 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