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을 토산(兎山)에 추방하였다. 방의(芳毅)·이방간(李芳幹)과 정안공(靖安公)은 모두 임금의 동복 아우였다. 임금이 적사(嫡嗣)가 없으니, 동복 아우가 마땅히 후사(後嗣)가 될 터인데, 익안공(益安公)은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근신하여 다른 생각이 없었고, 방간은 자기가 차례로서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배우지 못하여 광망하고 어리석었으며, 정안공은 영예(英睿)하고 숙성(夙成)하며 경서(經書)와 이치에 통달하여, 개국(開國)과 정사(定社)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귀부(歸附)하였다. 방간이 깊이 꺼리어서 처질(妻姪)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내(李來)에게 말하기를,
"정안공이 나를 시기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필부(匹夫)처럼 남의 손에 개죽음하겠는가!"
하니, 이내가 깜짝 놀라 말하였다.
"공(公)이 소인의 참소를 듣고 골육(骨肉)을 해치고자 하니, 어찌 차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정안공은 왕실(王室)에 큰 훈로가 있습니다. 개국과 정사가 누구의 힘입니까? 공(公)의 부귀(富貴)도 또한 그 때문입니다. 공(公)이 반드시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대악(大惡)의 이름을 얻을 것이고, 일도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방간이 불끈 성을 내어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를 도울 사람이면 말이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는 방간의 처의 양부(養父)인데, 꿇어앉아서 손을 비비며 말하기를,
"공은 왜 이런 말을 하십니까?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내(李來)는 우현보(禹玄寶)의 문생(門生)이었으므로, 우현보의 집에 가서 그 말을 자세히 하고, 방간이 이달 그믐날에 거사(擧事)하려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안공도 또한 공의 문생이니, 빨리 비밀히 일러야 합니다."
하였다. 우현보가 그 아들 우홍부(禹洪富)를 시켜 정안공에게 고하였다. 이날 밤에 정안공이 하윤(河崙)·이무(李茂) 등과 더불어 응변(應變)할 계책을 비밀히 의논하였다. 이 앞서 방간이 다른 음모를 꾸며 가지고 정안공을 그의 집으로 청하였는데, 정안공이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가지 못하였다. 다른날 방간이 정안공과 더불어 함께 대궐에 나가 임금을 뵙고 말[馬]을 나란히 하여 돌아오는데, 방간이 한번도 같이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삼군부(三軍府)에서 여러 공후(公侯)로 하여금 사냥을 하게 하여 둑제(纛祭)010) 에 쓰게 하였다. 정안공이 다음날 사냥을 나가려고 하여, 먼저 조영무(趙英茂)를 시켜 모릿꾼[驅軍]을 거느리고 새벽에 들에 나가게 하였다. 방간의 아들 의령군(義寧君) 이맹종(李孟宗)이 정안공의 저택(邸宅)에 와서 사냥하는 곳을 묻고,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도 오늘 또한 사냥을 나갑니다."
하므로, 정안공이 사람을 방간의 집에 보내어 그 사냥하는 곳을 정탐하였는데, 방간의 군사는 모두 갑옷을 입고 분주히 모였었다. 정안공이 이에 변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때에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 10인이 모두 정안공의 집에 모이었다. 정안공이 군사로 스스로 호위하고 나가지 않으려 하니, 이화와 이천우가 곧 침실로 들어가 군사를 내어 대응할 것을 극력 청하였다. 정안공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거절하기를,
"골육(骨肉)을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가 심한 것이다. 내가 무슨 얼굴로 응전하겠는가?"
하였다. 이화와 이천우 등이 울며 청하여 마지않았으나 또한 따르지 아니하고, 곧 사람을 방간에게 보내어 대의(大義)로 이르고, 감정을 풀고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방간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어찌 다시 돌이킬 수 있겠는가?"
"방간의 흉험한 것이 이미 극진하여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작은 절조를 지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정안공이 오히려 굳이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화가 정안공을 힘껏 끌어 외청(外廳)으로 나왔다. 정안공이 부득이 종 소근(小斤)을 불러 갑옷을 내어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권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정안공이 이에 나오니, 이화·이천우 등이 껴안아서 말에 오르게 하였다. 정안공이 예조 전서(禮曹典書) 신극례(辛克禮)를 시켜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궐문을 단단히 지켜 비상(非常)에 대비하도록 명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믿지 않았다. 조금 뒤에 방간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
하였다. 이문화가 이르기 전에 방간이 이미 인친(姻親) 민원공(閔原功)·기사(騎士) 이성기(李成奇) 등의 부추김을 받아, 이맹종(李孟宗)과 휘하 수백 인을 거느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태상전(太上殿)을 지나다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靖安)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방간이 군사를 행(行)하여 내성(內城) 동대문(東大門)으로 향하였다. 이문화(李文和)가 선죽교(善竹橋)가에서 만나서,
"교지(敎旨)가 있다."
하니, 방간이 말에서 내렸다. 이문화가 교지를 전하니, 방간이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말에 올라서 군사들을 가조가(可祚街)에 포진하였다. 정안공이 노한(盧閈)을 시켜 익안공(益安公)에게 고하기를,
"형은 병들었으니, 청하건대, 군사를 엄하게 하여 스스로 호위하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고, 또 이응(李膺)을 시켜 내성(內城) 동대문을 닫았다. 승지(承旨) 이숙번(李叔蕃)이 정안공을 따라 사냥을 나가려고 하여, 가다가 백금반가(白金反街)에 이르렀는데, 민무구(閔無咎)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빨리 병갑(兵甲)을 갖추고 오라!"
하였다. 이숙번이 이에 달려서 정안공의 저택(邸宅)에 갔으나, 그가 이르기 전에 정안공이 이미 군사를 정돈하여 나와, 시반교(屎反橋)를 지나 말을 멈추고, 여러 군사들이 달려와 말 앞에 모여서 거리를 막고 행(行)하지 않았다. 이숙번이 군사들로 하여금 각각 본패(本牌)에 돌아가게 하여 부오(部伍)가 정해지니, 정안공에게 고하기를,
"제가 먼저 적(敵)에게 나가겠습니다. 맹세코, 패하여 달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은 빨리 오십시오."
하고, 무사(武士) 두어 사람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갔다. 정안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한 곳에 모여 있다가 저쪽에서 만일 쏘면, 한 화살도 헛되게 나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일찍이 석전(石戰)을 보니, 갑자기 한두 사람이 작은 옆 골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 나오니까, 적들이 모두 놀라서 무너졌었다. 지금 작은 골목의 복병(伏兵)이 심히 두려운 것이다."
하고, 이지란(李之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활동(闊洞)으로 들어가 남산(南山)을 타고 행(行)하여 태묘(太廟) 동구(洞口)에 이르게 하고, 이화(李和)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산에 오르게 하고, 또 파자반(把子反)·주을정(注乙井)·묘각(妙覺) 등 여러 골목에 모두 군사를 보내어 방비하였다. 이숙번이 선죽(善竹) 노상(路上)에 이르니, 한규(韓珪)·김우(金宇) 등의 탄 말이 화살에 맞아 퇴각하여 달아났다. 이숙번이 한규에게 이르기를,
"네 말이 죽게 되었으니, 곧 바꿔 타라."
하고, 김우(金宇)에게 이르기를,
"네 말은 상하지 않았으니, 빨리 되돌아가서 싸우라."
하고, 이숙번이 달려서 양군(兩軍) 사이로 들어가니, 서귀룡(徐貴龍)이 또한 먼저 들어가서 이숙번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한 곳에 서서 쏩시다."
하니,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이런 때는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다. 나는 내[川] 가운데 서서 쏘겠다."
하였다. 정안공이 한규에게 말을 주어 도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임금이 또 대장군(大將軍) 이지실(李之實)을 보내어 방간에게 일러 중지하게 하려 하였으나,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져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방간이 선죽(善竹)으로부터 가조가에 이르러 군사를 멈추고, 양군이 교전하였는데, 방간의 보졸(步卒) 40여 인은 마정동(馬井洞) 안에 서고, 기병 20여 인은 전목 동구(典牧洞口)에서 나왔다. 정안공의 휘하 목인해(睦仁海)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김법생(金法生)이 화살에 맞아 즉사하였다. 이에 방간의 군사가 다투어 이숙번을 쏘았다. 이숙번이 10여 살을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양군(兩軍)이 서로 대치하였다. 임금은 방간이 명령을 거역하였다는 말을 듣고 더욱 노하고, 또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탄식하여 말하기를,
"방간이 비록 광패(狂悖)하나, 그 본심이 아니다. 반드시 간인(奸人)에게 매수된 것이다. 골육(骨肉)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니,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윤(河崙)이 아뢰기를,
"교서(敎書)를 내려 달래면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곧 하윤에게 명하여 교서를 짓게 하였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자리하여, 종실(宗室)·훈구(勳舊)·대소 신하의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함에 힘입어서 태평에 이를까 하였더니, 뜻밖에 동복 아우 회안공(懷安公) 방간이 무뢰(無賴)한 무리의 참소하고 이간하는 말에 유혹되어, 골육을 해치기를 꾀하니, 내가 심히 애통하게 여긴다. 다만 양쪽을 온전하게 하여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려 하니, 방간이 곧 군사를 놓아 해산하고 사제(私第)로 돌아가면, 성명(性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식언(食言)하지 않기를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한다. 그 한 줄의 군사라도 교지를 내린 뒤에 곧 해산하지 않는 자들은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고 아울러 군법으로 처단하겠다."
좌승지(左承旨) 정구(鄭矩)에게 명하여 교서를 가지고 군전(軍前)에 가게 하였는데, 이르기 전에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가 소속인 경상도(慶尙道) 시위군(侍衛軍)을 거느리고 검동원(黔洞源)을 거쳐 묘련점(妙蓮岾)을 통과하였다. 정안공이 검동(黔洞)앞 길에 군사를 머무르고 자주 사람을 시켜 전구(前驅)를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 형을 보거든 화살을 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베겠다."
하였다. 이화 등은 남산(南山)에 오르고, 이저(李佇)는 묘련점(妙蓮岾) 응달에 이르러 함께 각(角)을 불었다. 숙번이 기사(騎士) 한 사람을 쏘아 맞혔는데, 시위 소리에 응하여 꺼꾸러지니, 곧 방간의 조아(爪牙) 이성기(李成奇)였다. 이맹종(李孟宗)은 본래 활을 잘 쏘았는데, 이날은 활을 당기어도 잘 벌어지지 않아서 능히 쏘지 못하였다. 대군(大軍)이 각(角)을 부니, 방간의 군사가 모두 무너져 달아났다. 서익(徐益)·마천목(馬天牧)·이유(李柔) 등이 선봉(先鋒)이 되어 쫓으니, 방간의 군사 세 사람이 창을 잡고 한 데 서 있었다. 마천목이 두 사람을 쳐 죽이고 또 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정안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들은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라."
하였다. 서익(徐益)이 창을 잡고 방간을 쫓으니, 방간이 형세가 궁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정안공이 소근(小斤)011) 을 불러 말하기를,
"무지(無知)한 사람이 혹 형(兄)을 해칠까 두렵다. 네가 달려가서 빨리 소리쳐 해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소근이 고신부(高臣傅)·이광득(李光得)·권희달(權希達) 등과 더불어 말을 달려 쫓으니, 방간이 혼자서 달려 묘련(妙蓮) 북동(北洞)으로 들어갔다. 소근 등이 미처 보지 못하고 곧장 달려 성균관(成均館)을 지났다. 탄현문(炭峴門)으로부터 오는 자를 만나서 물으니, 모두
"보지 못하였다."
고 말하였다. 소근이 도로 달려 보국(輔國) 서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방간이 묘련 북동에서 마전(麻前) 갈림길로 나와서 보국동(輔國洞)으로 들어가는데, 안장을 띤 작은 유마(騮馬)가 뒤따라 갔다. 소근 등이 뒤쫓으니, 방간이 보국 북점(北岾)을 지나 성균관 서동(西洞)으로 들어서서 예전 적경원(積慶園) 터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갑옷을 벗고 활과 화살을 버리고 누웠다. 권희달 등이 쫓아 이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오는구나."
하니, 권희달 등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에 방간이 갑옷을 고신부에게 주고, 궁시(弓矢)를 권희달에게 주고, 환도(環刀)를 이광득에게 주고, 소근에게 말하기를,
"내가 더 가진 물건이 없기 때문에, 네게는 줄 것이 없구나. 내가 살아만 나면 뒤에 반드시 후하게 갚겠다."
하였다. 권희달 등이 방간을 부축하여 작은 유마(騮馬)에 태우고, 옹위하여 성균관 문 바깥 동봉(東峯)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방간이 울며 권희달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말을 들어서 이 지경이 되었다."
하였다. 정구(鄭矩)가 이르러 교서(敎書)를 펴서 읽고 방간의 품속에 넣어주니, 방간이 절하고 말하였다.
"주상의 지극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신은 처음부터 불궤(不軌)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정안(靖安)을 원망한 것뿐입니다. 지금 교서가 이와 같으니, 주상께서 어찌 나를 속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여생(餘生)을 빕니다."
이때에 목인해(睦仁海)가 탔던 정안공 집의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해 와서 스스로 제 집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반드시 싸움에 패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터에 가서 공과 함께 죽으려 하여 걸어서 가니, 시녀 김씨(金氏) 등 다섯 사람이 만류하였으나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 김씨(金氏)는 곧 경녕군(敬寧君)의 어머니이다.】 종 한기(韓奇) 등이 길을 가로 막아서 그만두게 하였다. 처음에 난이 바야흐로 일어날 즈음에 이화(李和)와 이천우(李天祐)가 정안공(靖安公)을 붙들어서 말에 오르게 하니, 부인이 무녀(巫女) 추비방(鞦轡房)·유방(鍮房) 등을 불러 승부를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이웃에 정사파(淨祀婆)라는 자가 사는데, 그 이름은 가야지(加也之)이다. 역시 그가 왔기에 부인이 이르기를,
"어제 밤 새벽녘 꿈에, 내가 신교(新敎)의 옛집에 있다가 보니, 태양(太陽)이 공중에 있었는데, 아기 막동(莫同)이가【 금상(今上)012) 의 아이 때의 휘(諱).】 해 바퀴 가운데에 앉아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니, 정사파가 판단하기를,
"공(公)이 마땅히 왕이 되어서 항상 이 아기를 안아 줄 징조입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한 일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하니, 정사파는 마침내 제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사파가 이겼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고하니, 부인이 그제서야 돌아왔다. 정안공이 군사를 거두어 마전(麻前)갈림길의 냇가 언덕 위에 말을 멈추고, 소리를 놓아 크게 우니, 대소 군사가 모두 울었다. 정안공이 이숙번을 불러 말하기를,
"형의 성품이 본래 우직하므로, 내가 생각하건대, 반드시 남의 말에 혹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으리라 여겼더니, 과연 그렇다. 네가 가서 형을 보고 난(亂)의 이유를 물어보라."
하였다. 이숙번이 달려가서 방간에게 물으니, 방간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숙번이 다시 묻기를,
"공이 이미 권희달에게 말을 하고서 왜 말을 하지 않습니까? 공이 만일 말하지 않으면 국가에서 반드시 물을 것인데, 끝내 숨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방간이 부득이 대답하였다.
"지난해 동지(冬至)에 박포(朴苞)가 내 집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의 큰비[大雨]에 대해 공은 그 응험을 아는가? 예전 사람이 이르기를, 「겨울 비가 도(道)를 손상하면 군대가 저자에서 교전한다.」 하였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 같은 때에 어찌 군사가 교전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니,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공(靖安公)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장차 변이 날 것이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공연히 타인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여, 이에 먼저 군사를 발한 것이다."
하였다. 이숙번이 돌아와서 고하니, 정안공이 드디어 저사(邸舍)로 돌아갔다. 임금이 우승지(右承旨) 이숙(李淑)을 보내어 가서 방간에게 이르기를,
"네가 백주(白晝)에 서울에서 군사를 움직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골육지정(骨肉至情)으로 차마 주살(誅殺)을 가하지 못하니, 너의 소원에 따라서 외방에 안치(安置)하겠다."
하였다. 방간이 토산(兎山) 촌장(村庄)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호군(大護軍) 김중보(金重寶)·순군 천호(巡軍千戶) 한규(韓珪)에게 명하여 방간 부자를 압령해서 토산에 안치하게 하였다. 박포(朴苞)는 본래 정안공의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였는데, 그날 병을 칭탁하여 나오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변을 관망하고 있었으나, 명하여 순군옥(巡軍獄)에 내리고, 또 방간의 도진무(都鎭撫) 최용소(崔龍蘇)와 조전 절제사 이옥(李沃)·장담(張湛)·박만(朴蔓) 등 10여 인을 가두었다. 그때에 익안공(益安公)은 오랜 병으로 인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었는데, 변을 듣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위에는 밝은 임금이 있고, 아래에는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방간이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였는가?"
하고, 곧 절제(節制)의 인(印)과 군적(軍籍)을 삼군부(三軍府)에 도로 바쳤다. 이 앞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아뢰기를,
"어제 어두울 때에 붉은 요기(妖氣)가 서북쪽에 보였으니, 종실(宗室) 가운데서 마땅히 맹장(猛將)이 나올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정안공을 지목하였는데, 8일 만에 난이 일어났다.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2면
- 【분류】변란-정변(政變) / 사법-행형(行刑) / 왕실-종사(宗社)
- [註 010]
○放懷安公 芳幹于兔山。 芳毅、芳幹及靖安公, 皆上之母弟也。 上無嫡嗣, 母弟當爲後。 益安性醇謹無他, 芳幹謂己以次當立, 然不學狂癡, 靖安公英睿夙成, 通經達理, 開國定社, 皆其功也, 故國人咸歸心焉。 芳幹深忌之, 謂妻姪判校書監事李來曰: "靖安公有猜於我, 我豈若匹夫徒死於人手乎?" 來驚曰: "公聽小人之讒, 欲害骨肉, 何可忍聞! 況靖安公有大勳於王室, 開國定社, 誰之力耶? 公之富貴, 亦由是耳。 公必欲如是, 則必得大惡之名, 而事且不成矣。" 芳幹忿然不悅曰: "助我者, 言不若此矣。" 宦者姜仁富, 芳幹妻之養父也。 跪而挼手曰: "公何爲發此言耶? 請勿復也。" 來, 禹玄寶之門生也。 詣玄寶第, 具道其言, 芳幹欲以是月晦日擧事。 且曰: "靖安公亦公之門生也, 宜速密諭。" 玄寶使其子洪富, 告于靖安公。 是夜, 靖安公與河崙、李茂等, 密議應變之策。 先是, 芳幹畜異謀, 邀公于第, 公欲往, 忽有疾不果。 異日, 芳幹與公, 偕詣闕謁上, 竝馬而回, 芳幹一不與語。 時三軍府令諸公侯, 獵禽以供纛祭, 靖安公將以明日出獵, 先令趙英茂, 領驅軍曉出于野。 芳幹子義寧君 孟宗, 詣靖安公邸, 問獵所, 因曰: "我父, 今日亦出獵。" 靖安公遣人芳幹第, 偵其獵所, 芳幹軍士, 皆甲而奔集, 靖安公乃知有變。 於是, 義安公 和、完山君 天祐等十餘人, 皆會靖安公邸。 公欲以軍士自衛不出, 和、天祐直入寢室, 力請擧兵應之。 靖安公涕泣固拒之曰: "骨肉相殘, 非義之甚, 我以何顔應之乎?" 和、天祐等泣請不已, 亦不從, 卽使人於芳幹, 諭以大義, 請釋憾相見, 芳幹怒曰: "吾志已定, 何可更回!" 和白靖安公曰: "芳幹凶險已極, 事勢至此, 豈可守小節, 不顧宗社大計乎?" 公猶固拒不出, 和力挽公出于外廳, 公不得已, 呼奴小斤, 令出甲分與諸將。 公入內, 夫人卽提甲被之, 加以單衣, 據大義勸令擧兵, 公乃出。 和、天祐等, 擁逼上馬, 公使禮曹典書辛克禮, 聞于上曰: "宜命固守闕門, 以備非常。" 上未信。 俄而, 芳幹使其麾下上將軍吳用權啓曰: "靖安公謀欲害我, 我不得已起兵攻之, 請上勿驚。" 上大怒, 使都承旨李文和, 往諭芳幹曰: "爾惑聽亂言, 謀戕同氣, 狂悖甚矣。 爾其釋兵, 單騎赴闕, 予將保全之。" 文和未至, 芳幹已爲姻親閔原功、騎士李成奇等所激, 率孟宗及麾下數百人, 擐甲執兵, 道過太上殿, 使人啓曰: "靖安將害臣, 臣不可空死, 故發兵應變。" 太上王大怒曰: "汝於靖安, 異父乎? 異母乎? 彼如牛人, 何乃至此耶!" 芳幹行兵向內城東大門, 文和遇於善竹橋邊, 稱有旨, 芳幹下馬, 文和宣旨, 芳幹不從, 遂上馬陳兵于可祚街。 靖安公使盧閈, 告益安公曰: "兄病矣, 請嚴兵自衛毋動。" 又使李膺閉內城東大門。 承旨李叔蕃欲從公出獵, 行至白金反街, 閔無咎使人曰: "速具兵甲來。" 叔蕃乃奔詣公邸, 未至, 公已整兵而出, 過屎反橋駐馬, 諸軍士奔集馬前, 闌街不行。 叔蕃令軍士各歸本牌, 部伍旣定, 告公曰: "我先赴敵, 誓不奔北, 公宜速來。" 乃率武士數人先馳, 公曰: "我軍屯聚一處, 彼若射之, 則無一矢虛發矣。 嘗觀石戰, 忽有一二人, 從旁小洞, 叫呼突出, 則敵皆驚潰。 今小洞伏兵, 甚可畏也。" 乃命李之蘭, 分軍入闊洞上南山。 行至太廟洞口, 令和領軍上南山, 又把子反、注乙井、妙覺等諸洞, 皆遣兵備之。 叔蕃到善竹路上, 韓珪、金宇等所騎馬, 中箭退走。 叔蕃謂韓珪曰: "汝馬將死, 宜卽易乘。" 謂金宇曰: "汝馬不傷, 宜速還戰。" 叔蕃馳入兩軍間, 徐貴龍亦先入, 呼叔蕃曰: "欲立一處而射。" 叔蕃答曰: "此等時不宜呼名。 我欲立川中射之。" 公與韓珪馬, 令還赴。 上又遣大將軍李之實, 諭芳幹止之, 矢下如雨, 不得入而還。 芳幹自善竹到可祚街駐兵, 兩軍交戰, 芳幹步卒四十餘人, 立於馬井洞內, 又騎兵二十餘人, 出典牧洞口。 公麾下睦仁海面中箭, 金法生中箭卽死。 於是, 芳幹軍士爭射叔蕃, 叔蕃發十餘矢, 皆不中, 兩軍相對。 上聞芳幹拒命, 益怒, 且恐其見害, 乃嘆曰: "芳幹雖狂悖, 非其本心, 必爲奸人所賣耳。 不意骨肉乃爾!" 參贊門下府事河崙啓曰: "賜敎書以誘之, 可解也。" 卽命崙製敎書曰:
予以否德, 托于臣民之上, 庶賴宗室勳舊大小之臣, 同心戮力, 以致豐平。 不意母弟懷安公 芳幹, 惑於無賴之徒讒間之言, 謀害骨肉, 予甚痛焉。 祇欲兩全, 以安宗社。 芳幹宜卽放散軍士, 歸於私第, 可全性命。 予不食言, 有如天日。 其一行軍士, 下旨之後, 不卽解散者, 予不敢宥, 竝以軍法處之。
命左承旨鄭矩, 齎赴軍前。 未至, 上黨侯 李佇率所領慶尙道侍衛軍, 歷黔洞源。 過妙蓮岾, 公駐兵黔洞前路, 數使人戒前驅曰: "若見我兄, 勿發矢。 違者, 斬。" 和等登南山, 佇至妙蓮岾之陰, 竝吹角。 叔蕃射中騎士一人, 應弦而倒, 乃芳幹爪牙李成奇也。 孟宗素善射, 是日, 彎弓不彀不能射。 大軍吹角, 芳幹軍皆奔潰, 徐益、馬天牧、李柔等, 爲先鋒追之。 芳幹軍三人, 執槍叢立, 天牧擊殺二人, 又將殺一人, 公見之曰: "彼無罪, 勿殺之。" 益執槍追芳幹, 芳幹勢窮北走, 公呼小斤曰: "予恐無知人或害兄, 汝走疾呼, 勿令致害。" 小斤與高臣傅、李光得、權希達等, 走馬追之。 芳幹獨馳入妙蓮北洞, 小斤等不及見, 直馳過成均館, 遇自炭峴門來者問之, 皆曰: "無。" 小斤還馳上輔國西峴望之, 芳幹自妙蓮北洞出麻前岐路, 入輔國洞, 有帶鞍小騮馬隨來。 小斤等追之, 芳幹過輔國北岾, 入成均館西洞, 到古積慶園基, 下馬解甲, 棄弓矢而臥。 見希達等追至, 謂曰: "汝等爲殺我來耶?" 希達等曰: "是何言耶! 公勿懼。" 於是, 芳幹以甲與臣傅, 弓矢與希達, 環刀與光得。 謂小斤曰: "我更無所持之物, 故無以與汝。 我若得生, 則後必重報。" 希達等扶持芳幹, 騎小騮馬, 擁至成均館門外東峯下馬。 芳幹涕泣謂希達等曰: "我聽人言, 以至於此。" 鄭矩至, 宣讀敎書, 納諸芳幹懷中。 芳幹拜曰: "感上至恩。 臣初無不軌之心, 但怨靖安耳。 今敎書如此, 上豈紿我哉? 願丐餘生。" 時睦仁海所騎靖安公邸馬, 中箭逸走, 自來入廐, 夫人意必戰敗, 欲自赴戰場, 與公同死, 徒步而往, 侍女金氏等五人, 諫之不能得, 【金氏, 卽敬寧之母也。】 奴韓奇等遮路止之。 初亂方作, 和、天祐扶靖安上馬, 夫人召巫女鞦轡房、鍮房等, 問勝否, 皆曰: "必勝, 無憂。" 隣居號淨祀婆者名加也之亦至, 夫人謂婆曰: "昨夜之曉夢, 我在新敎舊宅, 見太陽在空。 兒莫同 【今上兒諱】 正坐日輪之中, 是何兆也?" 婆判曰: "公當爲王, 常抱此兒之應也。" 夫人曰: "是何言也? 此事安可冀望也?" 婆遂歸其家。 至是, 婆聞捷聲來告, 夫人乃還。 公收兵駐馬于麻前岐路川邊塢上, 放聲痛泣, 大小軍士皆泣。 公召叔蕃曰: "兄性本愚直, 予意謂必惑人言而爲之, 果然。 汝往見兄, 問亂之由。" 叔蕃馳問芳幹, 芳幹不答。 叔蕃更問曰: "公已與希達言之, 何以不言? 公若不言, 國家必問之, 終能隱乎?" 芳幹不得已答曰: "前年冬至, 朴苞到吾家言曰: ‘今日大雨, 公知其應乎? 古人云: 「冬雨損道, 兵交於市。」’ 我答曰: ‘如此之時, 安有交兵之事乎?’ 苞曰: ‘靖安公視公之眼, 有異矣。 必將生變, 公宜先手。’ 我聞之, 以謂不可空死於他人之手, 乃先發耳。" 叔蕃還告, 公遂還邸。 上遣右承旨李淑, 往謂芳幹曰: "汝以白晝, 動兵京都, 罪在不宥。 然骨肉至情, 不忍加誅, 從汝所願, 外方安置。" 芳幹請歸兔山村庄, 上命大護軍金重寶、巡軍千戶韓珪, 押芳幹父子, 安置兔山。 苞本是靖安公助戰節制使也。 其日稱疾不出, 中立觀變, 命下巡軍, 又下芳幹都鎭撫崔龍蘇及助戰節制使李沃ㆍ張湛ㆍ朴蔓等十餘人。 時, 益安公緣宿疾, 闔門不出, 聞變痛哭流涕曰: "上有明君, 下有令弟, 芳幹何爲乃爾!" 卽還上節制之印幷軍籍於三軍府。 先是, 書雲觀啓曰: "昨昏, 赤祲見于西北, 宗室中當有猛將出。" 士大夫皆屬目靖安公, 八日而亂作。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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