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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4일 기축 4번째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대간이 상소하여, 각품의 고신을 대간에서 서경하는 법을 세울 것을 청하다

대간(臺諫)이 상소(上疏)하여, 다시 각품(各品)의 고신(告身)을 대성에서 서경(署經)하는 법을 청하였다. 문하부(門下府)의 소(疏)는 이러하였다.

"도(道)는 오르고 내리는 것이 있고, 정치는 풍속(風俗)으로 말미암아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차지한 자가 반드시 시대에 따라서 법을 세워 그 폐단을 구제합니다. 이것은 삼대(三代) 성왕(聖王)이 예제(禮制)를 의논하고 법도를 제정하여 연혁(沿革)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국조의 출사(出謝)005) 하는 법이 반드시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는 것은 실로 인재(人材)를 엄정하게 선발하는 요도(要道)입니다. 지금 5품(品) 이하만 본부(本府)로 하여금 서출(署出)하게 하고, 4품(品) 이상은 직접 관교(官敎)를 받으니, 인재를 쓰는 것은 한가지인데, 고신(告身)의 법은 나누어져 둘이니, 성대(盛代)의 오래갈 수 있는 법전이 아닌가 합니다. 대성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과 같은 기관이요, 공론(公論)이 있는 곳이므로, 무릇 의첩(依貼)006) ·시뢰(諡誄)007) ·구전(口傳) 등의 일을 반드시 대성으로 하여금 살피게 하는데, 하물며, 여러 관원을 제수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중한 일이요, 4품(品) 이상은 벼슬이 더욱 높고 책임이 더욱 중하니, 어찌 이목(耳目)의 관원으로 하여금 살피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청하건대, 그 불가한 것을 조목조목 말하겠습니다.

여러 관원은 인주(人主)가 더불어 천직(天職)을 같이하는 자들인데, 4품(品) 이상은 직접 관교(官敎)를 받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공론이 미치지 못하는 바라’ 하여 직사에 태만한 자가 매우 많이 있으니, 사공(事功)이 어디에서 일어나겠습니까? 그 불가한 것의 한 가지입니다.

수령(守令)은 백성을 가까이 하니 더욱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일찍이 일을 경험하지 않고, 잡직(雜職)을 인연하여 직질(職秩)이 4품(品)만 지나면, 곧 관교(官敎)를 받아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니, 국가에서 어떻게 행실의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과 가도(家道)의 착하고 악한 것을 알겠습니까? 임소(任所)에 가서는 조령(條令)을 준수하지 않고 방자하게 탐오(貪汚)를 행하여, 해(害)를 백성에게 끼치고 원망을 윗사람에게 돌리니, 그 불가한 것의 두 가지입니다.

사(士)는 농(農)에서 나오고 공(工)과 상(商)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관교의 법이 한번 행하여지니, 공상(工商)·천례(賤隷)도 오히려 모람(冒濫)하게 사진(仕進)하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그대로 인습하여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조정이 혼잡하게 될 것이니, 그 불가한 것의 세 가지입니다.

무릇 관직에 있는 자가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불의(不義)에 빠지기가 쉬우니,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는 것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근신하게 하는 지극한 술책입니다. 만일 미연(未然)에 금지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착한 데 힘쓰지 않아서 반드시 의(義)를 범하는 데에 이를 것이니, 그 불가한 것의 네 가지입니다.

전하께서 대(代)를 이은 임금으로 태평한 때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사풍(士風)을 격려하고 조정을 바로잡는 것으로 일을 삼을 것이요, 그 시행하는 법은 초창기(草創期)와 같이 할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관교의 법을 고쳐 특별히 대성으로 하여금 1품 이하의 고신(告身)을 서출(署出)하게 하여, 백관을 바루소서."

사헌부(司憲府)의 소(疏)는 이러하였다.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직임(職任)을 나누는 것은 여러 정사를 빛나게 하자는 것이요, 어기는 것을 다스리고 간특한 것을 규찰하는 것은 백관을 바루자는 것입니다. 대저 사람을 조정에 벼슬시킬 때에, 만일 한 사람의 천거에 의하여 조정 위에 두고 대간으로 하여금 고찰하게 하지 않으면, 사풍을 격려하고 백관을 바루는 소이가 아닙니다. 옛날에 조칙(詔勅)으로 사람을 썼는데, 만일 온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에서 모두 한결같이 논집(論執)하여 박정(駁正)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관직에는 적당한 사람을 얻고 정사에는 잘못된 거조(擧措)가 없었습니다. 고려 때 사람을 벼슬시킬 때에 반드시 대간에서 서경(署經)한 것은 이 방법를 쓴 것입니다. 생각건대, 태상(太上) 전하께서 개국하여 경영(經營)하실 때는 인심(人心)이 이합(離合)하는 즈음이었으므로, 곧 관교(官敎)의 법을 써서 훈로(勳勞)가 있는 인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때에 편의한 것을 취한 것이요, 만세에 법을 남기자는 소이는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수성(守成)하는 운수를 당하여 초창기(草創期)의 권의(權宜)의 법을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만일 태상왕의 제도를 감히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폐단이 장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선비가 몸을 경계하고 행실을 닦아 감히 방자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대간이 그 뒤를 의논하는 것을 두려워함입니다. 만일 관교의 제도가 행하여지고 서합(署合)의 법이 폐지되면, 관직에 태만하고 행실에 게으른 자가 거리낄 것이 없어서, 만사가 이로 인하여 무너지고, 사풍(士風)이 이로 인하여 진작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전하의 유신(維新)의 정치에 만일 곧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받아들여서 언로를 넓혀야 합니다. 지난번에 간신(諫臣)이 이것을 가지고 열거하여 올렸는데, 전하께서 즉시 유윤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간절히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원하건대, 한때 권의(權宜)의 제도를 고치고 고려의 고신(告身)의 법을 취하여, 모두 대간에서 서경(署經)한 연후에 각각 그 직사에 나가게 하시면, 사풍이 더욱 권장되고 모든 공적이 모두 빛나서, 치평(治平)의 교화를 거의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두 소장(疏章)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상량하고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니, 사사(使司)에서 아뢰기를,

"대간이 장신(狀申)한 것이 사리에 윤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62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註 005]
    출사(出謝) : 대간(臺諫)에서 새로 임명된 관원(官員)의 고신(告身)을 서경(署經)하여 내주던 일.
  • [註 006]
    의첩(依貼) : 대간(臺諫)이 서경(署經)하여 예조(禮曹)에 내주던 공첩(公貼).
  • [註 007]
    시뢰(諡誄) : 시호(諡號).

○臺諫上疏, 復請各品告身, 署經臺省之法。 門下府疏曰:

道有升降, 政由俗革, 故有國家者, 必因時立法, 以救其弊, 此三代聖王議禮制度, 不能無沿革之異也。 我朝出謝之法, 必署經臺省, 實精選人材之要道也, 今五品以下, 只令本府署出, 四品以上, 直受官敎。 用人一也, 而告身之法, 岐而二之, 恐非盛代經久之典也。 臺省, 人主耳目之官, 公論所在, 故凡依貼諡誄口傳等事, 必令臺省察之。 況除拜庶官, 實國家之所重, 四品以上, 位益高而責愈重, 豈可使耳目之官, 不加察哉? 臣等請條其不可。 庶官, 人主所與共天職者也。 四品以上, 直受官敎, 自謂公論所不及, 怠於職事者, 頗多有之, 事功何自而興乎? 其不可者一也。 守令近民, 尤不可不選。 今也僥倖之徒, 曾不更事, 夤緣雜職, 秩過四品, 則直受官敎, 挈家以行。 國家何知行實賢否, 家道善惡哉? 及其之任, 則不遵條令, 恣行貪汚, 貽害於民, 歸怨於上, 其不可者二也。 士出於農, 而工商不與焉, 今官敎之法一行, 而工商賤隷, 尙有冒進之意。 若因仍不革, 則必至於混雜朝廷矣, 其不可者三也。 凡在官者, 不畏公論, 則易陷於不義, 署經臺省, 實使人謹愼之至術也。 若不禁於未然, 則人不遷善, 而必至於犯義矣, 其不可者四也。 殿下以繼世之主, 當隆平之時, 宜以勵士風正朝廷爲務, 其施爲之法, 不可與草創之日同也。 伏惟殿下, 革官敎之法, 特令臺省, 署出一品以下告身, 以正百官。

司憲府疏曰:

設官分職, 所以熙庶政; 繩違糾慝, 所以正百官。 夫爵人於朝, 而苟以一人之所薦, 置諸朝廷之上, 不使臺諫考察, 則非所以勵士風正百官也。 古者, 詔勑用人, 如有不便者, 中書門下, 皆應論執駁正之。 是以官得其人, 而政無失擧。 前朝爵人, 必署經臺諫者, 用是道也。 恭惟太上殿下, 當開國經營之時, 人心離合之際, 卽用官敎之法, 以待勳勞之士, 斯乃取便一時, 非所以垂憲萬世也。 殿下當守成之運, 草創權宜之法, 在所當改。 苟以爲太上之制, 不敢輕改, 則其爲弊, 將有不可勝言者矣。 凡士飭身修行, 不敢縱肆者, 誠畏臺諫之議其後也。 若官敎之制行, 而署合之法廢, 則慢於官而怠於行者, 無所忌憚, 萬事以之而墮, 士風以之而不振矣。 況殿下維新之治, 苟有讜言, 所當採納, 以廣言路? 頃者, 諫臣以此列上, 殿下不卽兪允, 臣等竊爲殿下惜之。 願革一時之權制, 取前朝告身之法, 皆令署經臺諫, 然後各就其職, 則士風益勵, 庶績咸熙, 治平之化, 庶可期也。

上乃下二章于都評議使司, 擬議以聞。 使司啓曰: "臺諫狀申, 於理允當。" 上許之。


  •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62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