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종실록2권, 정종 1년 10월 19일 을묘 3번째기사 1399년 명 건문(建文) 1년

판삼사사 설장수의 졸기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졸(卒)하였다. 휘(諱)는 장수(長壽)요, 자(字)는 천민(天民)이었다. 그 선조는 회골(回鶻)103) 고창(高昌) 사람이었다. 지정(至正) 기해년에 아비 백료손(伯遼遜)104) 이 가족을 이끌고 우리 나라로 피난하여 오니, 공민왕(恭愍王)이 옛 지우(知遇)라 하여 전택(田宅)을 주고 부원군(富原君)으로 봉하였다. 임인년에 공(公)의 나이 22세에 동진사과(同進士科)에 합격하여 벼슬이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추성 보리 공신(推誠輔理功臣)의 호(號)를 하사 받았다. 정묘년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서울에 가서 주문(奏聞)하여 유이(流移)한 인호(人戶) 이타리불대(李朶里不歹) 등을 기취(起取)하는 것을 면제 받고, 인하여 관복(冠服)을 습용(襲用)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경오년 여름에 고려(高麗) 왕씨(王氏)를 복귀시키는 데 정책(定策)한 공(功)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임신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그해 여름에 죄를 얻어 해상(海上)으로 귀양갔는데, 태상왕이 잠저(潛邸) 때의 지우(知遇)라 하여 소환해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을 제수하고, 연산 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임금이 즉위하자, 명나라 서울에 가서 주문(奏聞)하게 되었는데, 행차가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니, 마침 황제가 붕어(崩御)하여 요동 도사(遼東都司)의 저지를 당하였다. 연도(沿途)에 머물면서 품(稟)하여 조정 명령을 받고, 인하여 진향사(進香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서울에 갔다. 건문(建文) 원년 6월에 성지(聖旨)를 받들어 주문(奏聞)하여 청(請)을 허락받고 돌아왔다. 10월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조회를 정지하고 제사를 내려 주고, 관(官)에서 장사를 지내 주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정(精)하고 민첩하며, 강(剛)하고 굳세며, 말을 잘하여, 세상에서 칭송을 받았다. 황명(皇明)을 섬기면서부터 명나라 서울[京師]에 입조한 것이 여덟 번인데, 여러 번 가상(嘉賞)을 입었다. 찬술(撰述)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또 시고(詩藁) 두어 질(帙)이 있다. 아들은 설내(偰耐)·설도(偰衜)·설진(偰振)이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58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103]
    회골(回鶻) : 위구르(uigur).
  • [註 104]
    백료손(伯遼遜) : 설손(偰遜).

○判三司事偰長壽卒。 諱長壽, 字天民, 其先回鶻 高昌人。 至正己亥, 父伯遼遜挈家避地于我國, 恭愍王以舊知, 賜田宅, 封富原君。 壬寅, 公年二十二, 中同進士科, 仕至密直提學, 封完城君, 賜號推誠輔理功臣。 丁卯, 以知門下府事, 奉表赴京, 奏免起取流移人戶李朶里不歹等, 仍蒙許襲冠服。 庚午夏, 以高麗 王氏復位定策功, 封忠義君。 壬申, 知貢擧, 夏, 得罪配海上。 太上王以潛邸知待召還, 除檢校門下侍中, 封燕山府院君。 戊寅秋, 上卽位, 赴京奏聞, 行至甛水站, 會帝崩, 蒙遼東都司阻當, 沿途停留, 稟奉朝旨, 仍充進香使赴京。 建文元年六月, 奏奉聖旨, 準請回還, 十月, 以疾卒, 年五十九。 訃聞, 輟朝賜祭。 官庇襄事, 賜諡文貞。 公天資精敏剛强, 善爲說辭, 爲世所稱。 自事皇, 朝京師者八, 屢蒙嘉賞。 所撰《直解小學》行于世, 且有詩藁數帙。 三子,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58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