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서중추원사 권근이 상서하여 시정의 여섯 가지 일을 말하다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여 시정(時政) 여섯 가지 일을 말하였다.
"첫째는 심술(心術)을 바루는 것이니,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백성을 다스리는 본원이요, 하늘을 감동시키는 추기(樞機)이니, 바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느낀 바가 있어 겨우 마음에서 동(動)하면, 곧 하늘에서 응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서교(西郊)에 순행하셨을 때, 다음날 우레하고 비가 내렸으며, 또 다음날 밤에도 성변(星變)이 있었으며, 돌아오신 다음날도 또 크게 벼락과 우레가 쳐서 재이(災異)가 거듭 이르렀습니다. 대개 치빙(馳騁) 사렵(射獵)할 즈음을 당하여, 전하의 마음에 반드시 즐겁게 여겼을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이 한 번 싹트면, 곧 반유(般遊)092) 하여 절도가 없는 시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재이(災異)를 나타내어 견고(譴告)를 보인 것입니다. 그 변괴(變怪)를 없애고자 하면, 또한 전하의 일심(一心)의 진실한 데에 있습니다. 옛적에 성왕(成王)이 한번 깨달으시니, 하늘이 바람을 돌이키었고093) , 송(宋)나라 경공(景公)이 한번 말하니, 형혹성(熒惑星)이 3사(舍)를 물러났으니094) , 하늘과 사람 사이에 감응(感應)은 심히 빠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구(恐懼)하고 수성(修省)하시어 마음을 다해 간(諫)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연사(宴私)의 안일에 빠지지 말며, 기욕(嗜欲)의 즐거움을 따르지 말고, 공경의 마음을 가지시어 심술을 바르게 하고 부지런히 실덕(實德)에 힘써서, 민생을 다스리고 천도(天道)에 응하소서.
둘째는 효도와 공경을 높이는 것이니, 효도라는 것은 인륜(人倫)의 근본이요, 왕화(王化)의 근원입니다. 전하가 한 나라의 부(富)를 차지하여 태상왕을 섬기니, 영화와 효성이 지극함이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존호(尊號)를 올리지 않고, 전명(殿名)을 세우지 않고, 궁문(宮門) 밖에 홍문(紅門)을 설치하지 않아서, 평범한 사람의 거실(居室)과 다를 것이 없으니, 존엄을 보이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전명(殿名)을 세우기를 청하니, 전하가 윤허하셨습니다. 지금 두어 달이 되었으나, 거행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만기(萬機) 가운데에 혹 잊으셨습니까? 임금은 신하의 하늘이 되고, 아버지는 아들의 하늘이 되니, 태상왕은 곧 전하의 하늘이십니다. 근심하고 부지런하여 덕(德)을 쌓아서, 왕업을 창건하고 대통(大統)을 전하여 억만년 무궁한 기업(基業)을 열어서 전하에게 전하였으니, 높은 공(功)과 성한 덕(德)이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는데, 존호를 올리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궐전(闕典)이 됩니다.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고자 하면, 마땅히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야 합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존호를 더 올리고, 전명(殿名)을 세우고, 홍문(紅門)을 설치하고, 관부(官府)를 개설(開設)하고 요속(僚屬)을 두어, 자주 조회(朝會)하고 문안(問安)하여서, 더욱 효도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두텁게 하소서.
셋째는 부지런히 정사(政事)를 듣는 것이니, 예전에는 인군(人君)이 매일 조정에 앉아 정사를 들었습니다. 고려 중엽에 조정에 앉는 것을 게을리 하여, 비로소 6아일(六衙日)에 한 번씩 정사(政事)를 듣고, 조회(朝會)를 받는 예(禮)가 있었는데, 쇠망한 말년에 이르러서는 다만 조회만 받고 정사는 듣지 않았으니, 그 근본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는 비록 조회는 받지 않았으나, 매양 아일(衙日)이면 반드시 정승(政丞) 이하 한두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여 함께 정치를 의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 유익함이 있으니, 대신을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는 것이 한 가지요, 함께 정치를 의논하는 것이 두 가지요, 군신(君臣)의 도가 합하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조회를 받고 예가 끝나면, 곧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시고, 일찍이 조정에 앉아 정사를 듣지 않으시며, 또 일찍이 대신을 인견하여 정사를 의논하지 않으시니, 군신의 정이 멀어져 서로 접하지 못하여, 고려의 말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아일(衙日)에 조회를 받은 뒤에도 그대로 앉아서 정사를 들으시고, 혹 내전에 들어가시면 대신을 인견하고 의논하시어, 한결같이 태상왕이 이루어 놓으신 법을 따르소서.
넷째는 유전(遊畋)095) 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유전(遊畋)의 낙(樂)이 비록 인군(人君)의 대계(大戒)라 하지만, 그러나 또한 그 방도(方道)가 있으니, 옛 인군이 유전(遊畋)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나라 인군이 일이 없으면 1년에 세 번 사냥하는데, 첫째는 간두(乾豆)를 위한 것이요, 둘째는 빈객(賓客)을 위한 것이요, 셋째는 임금의 푸줏간[庖]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간두(乾豆)라는 것은 말려서 두(豆)096) 에 채우는 것을 만드는 것이니, 이것은 종묘(宗廟)를 위한 것입니다. 하(夏)나라 속담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놀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쉴 수 있으며, 우리 임금이 즐기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도움을 받으리오? 한 번 놀고 한번 즐기는 것이 제후(諸侯)의 법도가 된다.’ 하였고,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봄에는 밭 가는 것을 살피어 부족[不給]한 것을 도와주고, 가을에는 수확하는 것을 살펴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준다.’ 하였으니, 이것은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지난 날에 전하께서 서교(西郊)에 순행하여 잡은 새를, 말려 두(豆)의 재물로 만든 것이 얼마나 됩니까? 지나는 곳에서 왕왕 밭고랑에 곡식을 거두지 않은 것이 있음을, 신(臣)이 거가(車駕)를 호종하면서 보았습니다. 먹을 수 없어서 거두지 않은 것도 있고, 먹을 수 있어도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은 진실로 불쌍하니, 마땅히 그 조세(租稅)를 면제하여야 하고, 미처 거두지 못한 것도 또한 불쌍하니, 마땅히 그 힘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전하께서 먹지 못할 것을 보고 조세를 면제해 준 것이 얼마나 되며,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을 보고 그 힘을 도와준 것이 얼마나 됩니까? 도와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먹이가 된 것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위로는 종묘를 위하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지 아니하며, 오직 탐락(耽樂)만 따르니, 알지 못하거니와 천의(天意)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이것이 그때에 재이(災異)를 여러 번 보인 까닭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전(遊畋)을 경계하여 감히 반유(般遊)하지 말며, 만일 혹 사냥을 하게 되면, 위로는 종묘를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생업을 도와 탐락을 따름이 없게 하소서.
다섯째는 사송(詞訟)의 기한(期限)을 세우는 것이니, 사송(詞訟)이 엄체(淹滯)되면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점점 심하여집니다. 변정 도감(辨定都監)이 도관(都官)으로 옮겨진 뒤부터 노비(奴婢)에 대한 소송이 오래 끌고 결단하지 못하여, 양쪽이 함께 지쳤습니다. 빌건대, 기한을 정하게 하여 반드시 소송의 소장(訴狀)을 바친 월일(月日)을 선후를 삼아, 매양 아일(衙日)에 소송을 결단한 것과 1 방(房)에서 몇 사건을 결단하였는가를 신문(申聞)하게 하되, 어긴 자는 규찰(糾察)하여 다스리고, 그릇 결단한 것은 헌사(憲司)로 하여금 복심(覆審)하여 살피게 하소서. 양부(兩府) 이상의 변송지법(辨訟之法)은, 고려의 옛 제도에 양부(兩府)가 청송관(聽訟官)을 그 집에 초치(招致)하여 그 사상(事狀)을 고하면, 청송관이 다 듣고나서 본사(本司)에 앉아서 결단하였는데, 쇠망한 말년에 이르러서는 소송이 심히 번다하고, 간사(奸邪)와 허위(虛僞)가 날로 심하여 청송관이 양부의 문(門)에 나가지 못하고, 양부가 도리어 청송관의 집에 가니, 식자(識者)들이 오히려 그르게 여겼습니다. 금년 8월에 하교(下敎)하여 사알(私謁)을 금지한 뒤로부터 변송(辨訟)하는 자가 사문(私門)에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때문에 양부가 또한 청송관의 집 뜰에 가서 노예와 천인(賤人) 가운데 서서 변송하는 일이 있으니, 작위(爵位)를 중하게 여기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혹은 부끄럽게 여겨 감히 가서 변송(辨訟)하지 않고 억울한 뜻을 품는 자가 있습니다. 원하건대, 양부(兩府)와 현관(顯官) 3품(品) 이상의 변송하는 자는 청송관(聽訟官)의 집에 가서 변송하는 것을 허락하고, 자기와 같은 종족[同宗]이 아닌데 가탁(假托)하여 간청하는 자는 한결같이 교지(敎旨)에 의하여 엄하게 규치(糾治)를 가하소서.
여섯째는 정령(政令)의 신(信)을 보이는 것입니다. 신(信)이라는 것은 인군(人君)의 큰 보배이니, 나라는 백성으로 보전되고, 백성은 신(信)으로 보전되는 것입니다.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우인(虞人)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고097) ,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나무를 옮기[徙木]는 명령을 폐하지 않은 것은098) 신(信)을 온전히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내린 조령(條令)과 각사(各司)에서 아뢴 것을 의윤(依允)한 것이 모두 다 훌륭한 법이요 아름다운 뜻인데, 행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금년 8월에 반포하여 내린 유지(宥旨)안의 한 조목에, ‘무진년이래 속공(屬公)한 노비(奴婢)를 환급(還給)하라.’고 한 일 같은 것은, 각사에서 혹 보충하여 대신할 사람이 없음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놓아주지 않고 있는데, 본주(本主)는 오래되면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도리어 나라의 명령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마땅히 곧 날을 정하여 일체 모두 방환(放還)하여 신(信)을 보이시고, 그 나머지 다 거행하지 못한 것도 또한 헌사(憲司)로 하여금 규찰 시행하게 하여 길이 항구한 법식으로 삼으소서."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57면
- 【분류】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
- [註 092]반유(般遊) : 즐겁게 놀아나는 것.
- [註 093]
성왕(成王)이 한번 깨달으시니, 하늘이 바람을 돌이키었고 : 주공(周公)이 참소를 당하여 동쪽에 은거할 때, 하늘에서 바람이 크게 불어 벼가 모두 쏠리고 나무가 뽑히었는데, 성왕(成王)이 금등(金藤)의 글을 보고 깨달아서, 다시 주공(周公)을 맞아오니, 하늘이 바람을 돌이켜 벼가 모두 일어났다는 고사(故事).- [註 094]
송(宋)나라경공(景公)이 한번 말하니, 형혹성(熒惑星)이 3사(舍)를 물러났으니 : 송(宋)나라 경공(景公) 때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범(犯)하였으므로, 자위(子韋)에게 그 연고를 물으니, 자위가 말하기를,"화(禍)가 임금에게 당합니다. 그러나 재상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재상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하매, 자위가 말하기를,"백성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백성이 없으면 누구를 위해 임금노릇하겠는가?" 하매, 자위가 말하기를,"다음 해에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흉년이 들면 백성이 굶어 죽을 것이니, 임금으로서 백성을 죽이면 누가 나더러 임금이라 하겠는가!" 하고, 세 번이나 모두 거절하였는데, 이 말이 있자, 형혹성이 3사(舍)를 옮겨 물러났다는 고사(故事).- [註 095]
유전(遊畋) : 유렵(遊獵).- [註 096]
두(豆) : 제기의 하나. 마른 제물을 담음.- [註 097]
위(魏)나라문후(文侯)가 우인(虞人)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고 : 위(魏)나라의 문후(文侯)가 우인(虞人)과 더불어 사냥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그날 마침 비가 몹시 내리니, 좌우에서 만류하였으나, 문후가 말하기를,"내가 우인(虞人)과 약속하였으니, 어찌 약속한 대로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약속대로 갔다는 고사(故事).- [註 098]
진(秦)나라효공(孝公)이 나무를 옮기[徙木]는 명령을 폐하지 않은 것은 :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상앙(商鞅)의 개혁안(改革案)을 채용할 때, 백성들이 법을 믿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都城)의 남문(南門)에 세워 놓고, 백성들에게 이것을 북문(北門)으로 옮기는 자가 있으면 50금(金)을 주겠다고 선포하였는데, 한 사람이 옮기는 자가 있으므로 곧 50금을 주었다는 고사(故事).○簽書中樞院事權近上書, 陳時政六事:
一曰正心術。 人主一心, 治民之本源, 感天之樞機, 不可以不正也。 苟有所感, 纔動於心, 卽應於天。 往者殿下, 巡幸西郊, 明日雷雨, 又明日夜, 有星變, 旣還明日, 又大震雷, 災異荐至。 蓋當馳騁射獵之際, 殿下之心, 必以爲樂。 樂心一萌, 卽是般遊無度之漸, 故天現異, 以彰譴告。 欲消其變, 亦在殿下一心之誠。 昔成王一悟, 天乃反風; 宋景一言, 熒惑退舍。 天人之間, 感應甚速。 伏惟殿下, 恐懼修省, 虛懷納諫, 毋溺宴私之安, 毋徇嗜欲之樂, 持敬以正心術, 克勤以懋實德, 以治民生, 以應天道。 二曰崇孝敬。 孝者, 人倫之本, 王化之源。 殿下富有一國, 以事太上王, 榮孝之至, 無以加矣。 然尊號未加, 殿名未立, 宮門之外, 不設紅門, 殆與平人之居無異, 非所以示尊嚴也。 頃者, 門下府請立殿名, 殿下允之, 迨今數月, 未聞擧行。 萬幾之中, 豈忘之耶? 君爲臣之天, 父爲子之天, 太上王, 卽殿下之天也。 憂勤積累, 創業垂統, 以開億萬年無疆之基, 以傳殿下, 隆功盛德, 與天罔極, 而尊號未上, 誠爲闕典。 欲盡事天之道, 當盡事親之誠。 願自今, 加上尊號, 立殿名設紅門, 開府置屬, 數朝問安, 益敦孝敬之誠。 三曰勤聽政。 古者人君, 每日坐朝聽政, 前朝中葉, 怠於坐朝, 始於六衙日一聽政, 因有受朝之禮。 及至衰季, 但受朝而不聽政, 失其本矣。 我太上王, 雖不受朝, 每於衙日, 必引政丞以下一二大臣, 共議政治, 有三益焉。 敬重大臣一也, 共論政治二也, 君臣道合三也。 今我殿下, 受朝禮畢, 卽入于內, 未嘗坐朝聽政, 亦未嘗引大臣論政, 君臣之情, 邈不相接, 殆與前朝之季, 無以異焉。 願殿下, 每於衙日受朝之後, 坐而聽政, 或入于內, 則引大臣論議, 一遵太上王成憲。 四曰戒遊畋。 遊畋之樂, 雖人君之大戒, 然亦有其道焉。 古之人君, 非不遊畋也, 《禮記》曰: "國君無事, 歲三畋。 一爲乾豆, 二爲賓客, 三爲充君之庖。" 乾豆者, 乾之以爲豆實, 是爲宗廟也。 夏諺曰: "吾王不遊, 吾何以休! 吾王不豫, 吾何以助! 一遊一豫, 爲諸侯度", 而孟子曰: "春省耕而助不給, 秋省斂而補不足。" 是爲民也。 往日殿下, 巡幸西郊, 所獲之禽, 乾之以爲豆實者幾何? 所過之地, 往往田畝有不收者, 臣獲扈駕而觀之矣。 有不可食而不收者焉, 有可食而不及收者焉。 不可食者, 固可憫也, 宜除其租; 不及收者, 亦可憫也, 宜助其力。 殿下見不可食而除其租者幾何? 見不及收而助其力者幾何? 不惟不助, 而被芻秣者亦多有之。 上不爲宗廟, 下不爲民, 而唯耽樂之從, 未審天意以爲如何? 此所以當其時災異屢見者也。 願殿下戒遊畋, 不敢般遊, 苟或爲之, 則必上爲宗廟, 下補民業, 而無耽樂之從。 五曰立詞訟之限。 詞訟之滯, 冤屈滋甚。 自辨定都監移來都官, 奴婢爭訟, 淹滯不決, 兩邊俱瘁。 乞令定限, 必以訴訟呈狀日月爲先後, 每於衙日, 申聞所決一房決幾道; 違者, 糾理; 誤決者, 令憲司覆察。 其兩府以上辨訟之法, 前朝舊制, 兩府招致聽訟官於其家, 告其事狀, 聽訟官聞訖, 坐於本司而決。 及至衰季, 詞訟甚煩, 奸僞日滋, 聽訟官不得進於兩府之門, 兩府乃反往於聽訟者之家, 識者猶以爲非。 自今年八月敎禁私謁之後, 辨訟者不得進於私門。 由是兩府, 亦有往於聽訟官之庭, 辨於奴隷賤人之中, 非所以重爵也。 或有恥之, 不敢往辨, 而懷鬱抑之志者焉。 願兩府及顯官三品以上辨訟者, 許於聽訟官家往辨, 其非自己及同宗假托干請者, 一依敎旨, 嚴加糾治。 六曰示政令之信。 信者, 人君之大寶。 國保於民, 民保於信。 魏 文侯不失虞人之期, 秦 孝公不廢徙木之令, 所以全信也。 殿下卽位以來, 所降條令及各司所申依允者, 悉皆良法美意, 而不能盡行者多矣。 如今年八月頒降宥旨內一款, 戊辰年已來屬公奴婢還給之事, 各司或因未有充代之人, 至今不放, 本主恐其久而不給, 反謂國令以爲不信。 宜卽定日, 一皆放還, 以示其信, 其餘未盡擧行者, 亦令憲司糾察施行, 永爲恒式。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57면
- 【분류】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
- [註 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