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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실록 2권, 정종 1년 7월 10일 무인 6번째기사 1399년 명 건문(建文) 1년

백제의 후손으로 일본 좌경대부 육주목인 의홍에게 본관과 토전을 주는 일에 대한 의논

일본 좌경 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구주(九州)를 쳐서 이기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그 공적을 말하였다. 임금이 의홍(義弘)에게 토전(土田)을 하사하고자 하다가,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과 간관(諫官)의 의논으로 그만두었다. 의홍이 청하기를,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백제(百濟)의 토전(土田)을 청하였다. 임금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그 가문의 세계를 상고하게 하니, 세대가 멀어서 징험할 수가 없었다. 잠정적으로 백제 시조(始祖) 온조(溫祚) 고씨(高氏)의 후손으로 하여 토전(土田) 3백 결(結)을 주기로 의논하니,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이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어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금 왕지(王旨)를 받들어 일본국 육주목 의홍에게 토전을 주는 일은, 봉군(封君)의 작(爵)으로 주고 해마다 봉록(俸祿)을 하사하여 그 공을 포상(褒賞)하는 것만큼 적의(適宜)하지 못합니다. 대개 토전을 하사함의 불가한 것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토전을 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한 가지 불가한 것이요, 해마다 조세(租稅)를 실어 보내는 것이 공(貢)을 바치는 것 같으니, 두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들이 장차 해마다 사람을 보내어 친히 조세를 거두게 되면, 우리 백성이 해를 받을 것이니, 세 가지 불가한 것이요, 금(禁)하면 저들이 반드시 노여움을 품을 것이고, 따른다면 우리 백성에게 해가 될 것이니, 네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 사람들은 진실로 믿기가 어려우니, 뒤에 불순함이 있어서 그 토전을 회수하면, 그로 인하여 변흔(邊釁)을 이룰 것이니, 다섯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들이 장차 책하기를, ‘내가 받은 토전을 자손에게 전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빼앗는가?’ 하고, 토전을 되찾는다고 이름하여 와서 우리를 침구(侵寇)하면, 저들은 바르고 우리는 잘못이 되어, 변을 장차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니, 여섯 가지 불가한 것이요, 우리 강토의 토전이 저들의 소유가 되면, 후세에 반드시 자손의 근심이 될 것이니, 일곱 가지 불가한 것입니다. 또 더구나 토전을 주는 것은 약한 나라가 땅을 베어 강한 나라에게 주어 화호(和好)를 구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의 토전이 저들에게 공(貢)을 바치니, 우리가 저들의 변강(邊疆)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혹 불순한 일이 있으면 회수하기가 진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작명(爵命)으로 주면, 큰 나라가 작은 나라의 경(卿)에게 작명을 주는 것과 같으니, 우리의 위명(威名)이 저들에게 가(加)하여지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일 우리의 번신(藩臣)이 되어 진실로 불순한 일이 있으면, 대의(大義)로 책하고 그 작명(爵名)을 회수하여 봉록(俸祿)을 정지하더라도, 저들이 장차 무슨 말로 우리를 책하겠습니까? 경중(輕重)의 형세와 이해(利害)의 기틀을 환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하고 의논해서 신문(申聞)하여 시행하소서."

사사(使司)에서 그 글로써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여러 말을 할 것이 없다."

하니,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석명(朴錫命)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가만히 듣건대, 《춘추(春秋)》에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분변을 삼간 것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니면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서 화하(華夏)를 어지럽히는 계제가 싹트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춘추》의 의(義)가 전해지지 못하여, 한(漢)나라에서 남선우(南單于)051)오원새(五原塞)052) 에 머무르게 하고, 사성(賜姓)하여 번신(藩臣)으로 삼았는데, 그 뒤에 유연(劉淵)053) ·유총(劉聰)054) 은 크게 중국의 근심이 되었고, 당(唐)나라에서 융적(戎狄)에게 원병을 구하였는데, 마침내 그 독을 입었고, 송(宋)나라두 황제[二帝]055) 가 북쪽으로 순행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도 또한 금(金)나라와 화친한 까닭이었습니다. 역대에서, 융적(戎狄)에 대하여 어거하는 도리를 잃어서 도리어 제압을 당한 것을 소상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 동쪽에 있어서 대대로 변경의 근심이 된 것이 중국의 융적과 같습니다. 지금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적을 토벌한 공이 있고, 백제(百濟) 고씨(高氏)의 후손이라고 칭한다 하여, 전지 3백 결(結)을 주어 채지(采地)를 삼게 하니, 신 등은 생각하건대, 의홍이 적을 토벌한 공이 있으면 전백(錢帛)으로 상주는 것이 가(可)할 것입니다. 산천(山川)과 토전(土田)은 천자(天子)에게 받았으니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왜인(倭人)의 사람된 품이 그 마음이 강퍅하고 사나와서, 변사(變詐)가 무상하여 예의로 사귀는 것은 없고, 오직 이(利)만을 생각합니다. 지금 의홍이 이미 육주(六州)의 땅을 차지하였으니, 그 인민의 많음과 갑병(甲兵)의 날카로움이 부족한 것이 없는데, 백제의 후손임을 밝히고자 하고 백제의 땅을 얻기를 원하니, 그 마음가짐을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채지(采地)의 연고로 인하여 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허실(虛實)을 엿보아 불측한 변을 일으키면, 비록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또한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홍에게 금백(金帛)과 그가 청구한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상주시고, 토전을 주지 마시면, 융적을 어거하고 공을 상주는 도가 적의(適宜)할 것입니다."

임금이 사사(使司)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河崙)·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조온(趙溫)이 낭사(郞舍)에서 진달한 것만 따르고 나머지는 좇지 않았다. 중추원(中樞院)에서도 역시 서로 득실(得失)을 말하였다. 사사(使司)에서 계문하니, 임금이 또한 좇지 않고 말하기를,

"의홍이 우리 나라에 향(向)하여 정성을 바쳐 적을 쳐부수었는데, 그 청구하는 바는 오직 이 일뿐이다. 하물며 본래 토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본가의 계통을 추명(推明)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실속 없는 은혜를 베풀어 실속 있는 보답을 얻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설혹 뒤에 변이 있더라도 시기에 임하여 응변(應變)하면 또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고, 일을 호조(戶曹) 급전사(給田司)에 내리고 말하였다.

"일본국 육주목(六州牧) 좌경 대부(左京大夫) 의홍은 본래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고씨(高氏)의 후손인데, 그 선조가 난을 피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대대로 상승(相承)하여 육주목에 이르러 더욱 귀하고 현달하게 되었다. 근년 이래로 대마도(對馬島) 등 삼도(三島)의 완악한 백성들이 흉도(兇徒)를 불러 모아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어지럽히고 인민들을 노략하여, 이웃 나라 사이의 화호(和好)를 저해하였다. 지난번에 대상국(大相國)이 의(義)로써 발병(發兵)하여 몸소 스스로 독전(督戰)해서 그 무리를 섬멸하였으니, 변경의 인민들이 편안하고 조용하게 되어, 생민에게 해독이 없게 하고 두 나라로 하여금 화호를 닦게 하였다. 내가 그 공을 아름답게 여겨 그 공적을 말하기를, ‘참으로 잊지 못하여 〈그 공을〉 갚고자 생각한다.’고 하였다. 너희 호조 급전사(戶曹給田司)에서는 그 선조의 전지가 완산(完山)에 있는 것을 상고하여, 예전대로 절급(折給)하여 채지(采地)를 삼도록 해서 특수한 공훈을 포상하라."

급전사(給田司)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이문(移文)하여 답험(踏驗)하게 하고, 그 문적(文籍)을 만들어서 영업전(永業田)에 충당하게 하였다. 사사(使司)에서 의홍의 사자인 중[僧]에게 토전을 준다는 일을 말하니, 중이 대답하기를,

"만일 세계(世系)를 명시(明示)하여 주시면 전지를 주지 않더라도 또한 좋습니다."

하니,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 등이 또 상언(上言)하였다.

"일본국 육주목 의홍에게 채지(采地)를 봉(封)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소(疏)를 갖추어 아뢰었으나, 분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미치고 어리석은 말로 다시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일을 하는 데 시초에 도모한다.’ 하였습니다. 대저 다른 사람과 교결(交結)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 시초에 도모하여야 합니다. 처음에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가 뒤따라 이릅니다. 지금 의홍의 적을 토벌한 공으로 특별히 백제의 후손이라 일컫고 토전을 주면, 후세에 쟁란(爭亂)의 단서가 여기에서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한결같이 전일의 계달한 바에 의하여 시초에서 삼가서 만세의 계책을 삼으소서. 만일 신 등이 오활하여 치도(治道)의 사체(事體)에 어둡다 하고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는다면, 비록 나중에 뉘우치더라도 그 후회[噬臍]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교서감 승(校書監丞) 김시용(金時用)이 또한 성씨(姓氏)의 적(籍)과 토전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으로 상언(上言)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51면
  • 【분류】
    외교-왜(倭)

  • [註 051]
    남선우(南單于) :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의 한 부족. 중국과 인접하여 다른 흉노족보다 중국에 향화(向化)한 일이 많음.
  • [註 052]
    오원새(五原塞) : 한(漢)나라의 북방 요새. 오원군(五原郡) 유류새(楡柳塞)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수원성(綏遠省) 오원현(五原縣)에 있음.
  • [註 053]
    유연(劉淵) : 흉노(匈奴)의 추장. 흉노 추장 묵특(冒頓)의 후손. 전조인(前趙人). 자는 원해(元海), 시호는 광문(光文). 대선우(大單于)가 되어 한왕(漢王)이라 모칭(冒稱)하고 진(晉)나라 회제(懷帝) 영가(永嘉) 2년에 포자(蒲子)에 도읍함.
  • [註 054]
    유총(劉聰) : 흉노의 추장. 유연(劉淵)의 네째 아들. 자는 현명(玄明), 시호는 소무(昭武). 전조인(前趙人). 영가(永嘉) 4년에 낙양(洛陽)을 함락하여 회제(懷帝)를 사로잡은 소위 영가(永嘉)의 난(亂)을 일으켰음.
  • [註 055]
    두 황제[二帝] : 휘종(徽宗) 흠종(欽宗).

日本左京大夫六州義弘九州克之, 遣使來獻方物, 且言其功。 上欲賜義弘土田, 以簽書中樞院事權近及諫官之議乃止。 義弘請云: "我是百濟之後也。 日本國人不知吾之世系與吾姓氏, 請具書賜之。" 又請百濟土田。 下都評議使司 考其家世, 世遠無徵。 假以百濟始祖溫祚 高氏之後, 議給土田三百結。 簽書中樞院事權近致書都堂曰:

竊惟今者, 奉承王旨, 賜土田于日本國 六州義弘之事, 不若授以封君之爵, 歲賜俸祿, 以褒其功之爲宜。 夫錫土田, 有不可者七。 以我之土田, 與彼之人, 一不可也; 歲輸租稅, 似乎納貢, 二不可也; 彼將歲遣人, 親自收租, 吾民受害, 三不可也; 禁之則彼必含怒, 順之則害及吾民, 四不可也; 彼固難信, 後有不順, 收其土田, 因而成釁, 五不可也; 彼將責曰: "我所受田, 傳之子孫, 何故奪之?" 名以復田, 來寇於我, 彼直我曲, 變將不測, 六不可也, 我疆之田, 爲彼之有, 後世必爲子孫憂, 七不可也。 又況錫以土田, 似乎弱國割地, 與强國求和之事。 吾之土田, 納貢于彼, 而吾若爲彼之邊鄙, 或有不順, 收之固難。 授以爵命, 似乎大國錫命小國之卿之義, 我之威名加于彼, 而彼若爲吾藩臣, 苟有不順, 責以大義, 收其爵命, 停其祿俸, 彼將何辭以責我哉? 輕重之勢、利害之機, 較然可覩, 伏惟擬議申聞施行。

使司以其書啓聞, 上曰: "事已定矣, 不必多言。" 左散騎常侍朴錫命等上疏曰:

竊聞《春秋》, 謹華夷之辨者, 以其非我族類, 其心必異, 萌猾之階也。 後世《春秋》之義不傳, 南單于, 款五原塞, 賜姓爲藩臣, 其後劉淵劉聰, 大爲中國之患; 求援於戎狄, 而卒被其毒; 之二帝, 北巡而不返, 亦與和親之故也。 歷代之於戎狄, 失其御之之道, 反爲所制, 班班可見。 日本在我國東, 世爲邊境之患, 若中國之有戎狄也。 今以六州義弘, 有討賊之功, 稱百濟 高氏之後, 賜田三百結以爲采地。 臣等竊謂, 義弘有討賊之功, 賞以錢帛可也。 山川土田, 受之天子, 不可私以與人也。 且之爲人, 其心强狠, 變詐無常, 無禮義之交, 惟利是視。 今義弘旣有六州之地, 其人民之衆、甲兵之利, 非不足也, 而欲明百濟之後, 願得百濟之地, 其設心未可知也。 若因采地之故, 出入無防, 窺覘虛實, 以生不測之變, 則雖悔於終, 亦將奚及! 願殿下, 賞義弘以金帛與其所求大藏經板, 毋以土田錫之, 則其御戎賞功之道, 得矣。

下使司議之。 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參贊門下府事趙英茂、政堂文學河崙、參知門下府事趙溫, 從郞舍所陳, 餘皆不從, 中樞院亦互言得失。 使司啓聞, 上亦不從曰: "義弘向吾國推誠破賊, 其所求惟此事, 況本非要土地, 乃要推明本系也。 是乃行虛惠而獲實報也, 何不可之有! 設有後變, 臨機應之, 又何難乎!" 事下戶曹給田司曰: "日本國 六州牧左京大夫義弘, 本百濟始祖溫祚王 高氏之後, 其先避難, 徙於日本, 世世相承, 至于六州牧, 尤爲貴顯。 比年以來, 對馬等三島頑民, 召聚兇徒, 侵擾我疆, 虜掠人民, 以阻隣好。 頃者, 大相國以義發兵, 身自督戰, 殄殲其衆, 而邊境人民, 得以寧靖, 使生民除害, 而兩國修好。 予嘉乃功, 曰篤不忘, 思有以報之。 惟爾戶曹給田司, 其考先祖之田之在完山者, 依舊折給, 以爲采地, 用旌殊勳。" 給田司奉王旨, 移文於全羅道觀察使, 令踏驗成籍, 以充永業。 使司言於義弘使僧以給田之事, 僧答曰: "若明示世系, 則休給亦得。" 門下府郞舍等又上言: "日本國 六州義弘, 不當封采地, 具疏以聞, 未蒙進止, 敢以狂瞽之言, 再瀆天聰。 《易》曰: "君子以, 作事謀始。" 大抵交結於人, 必謀其始, 始而不謀, 悔吝隨至矣。 今以義弘討賊之功, 特稱百濟之後, 錫之土田, 竊恐後世爭亂之端, 兆於此矣。 伏惟一依前日所啓, 謹之於始, 爲萬世計。 若以臣等爲迂遠而昧於治體, 不賜兪音, 則雖悔於終, 噬臍無及矣。" 校書監丞金時用, 亦上言以不宜賜姓氏之籍及土田之意。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51면
  •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