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부에서 올린 시무(時務) 10개 조에 관한 상소문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上疏)하여 시무(時務) 열 가지를 진술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1. 효(孝)라는 것은 만 가지 선(善)의 근원이요, 백 가지 행실의 근본이니, 요(堯)·순(舜)의 도(道)가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상왕(太上王)께서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시니, 마땅히 시선(視膳)·문안(問安)의 직책을 부지런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한결같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태상(太上)을 봉양하던 제도에 의하여, 태상왕의 궁을 성안에 두어 ‘대안궁(大安宮)’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문안을 부지런히 하여 만세에 모범을 남기소서.
1. 태상왕은 높기가 국군(國君)의 아버지가 됩니다. 전하께서 한 나라의 부력(富力)으로 받들어 섬기시니, 봉양하는 도(道)가 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원하건대 이제부터 그 궁중의 집사(執事)는 액수를 정하여 어질고 능한 사람을 뽑아서 그 일을 보살피게 하시고, 시종하는 사람은 늙고 오래된 사람으로서 일찍부터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교대하여 입시하게 하시고, 또 절제사(節制使)로 하여금 윤번(輪番)으로 시위하게 하여, 승도(僧徒)와 노예의 무리는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1. 예전에 성왕(聖王)이 관제(官制)와 녹(祿)을 제정하여 각각 그 직책이 있어서, 직책이 없이 녹(祿)을 먹는 자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늙고 병들어 직사(職事)에 마땅하지 않은 자를 모두 검교(檢校)를 주어서, 직책을 맡지 않고도 앉아서 천록(天祿)을 소모하니, 자못 선왕(先王)의 관제를 설치하고 녹을 제정한 뜻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대소 신료(臣僚) 가운데 나이가 70세인 자는 치사(致仕)하도록 허락하여 각각 사제(私第)로 나가게 하고, 비록 칠순(七旬)이 되지 않았더라도 직사에 마땅하지 않은 자는 또한 검교(檢校)의 직책을 허락하지 말 것입니다. 또한 고례(古禮)에는 부인(婦人)에게는 바깥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또한 직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옹주(翁主)가 19명, 택주(宅主)가 52명, 국부인(國夫人)이 4명, 여관(女官)이 9명, 총계 84인이 앉아서 천록을 먹으니, 나라에 도움될 것이 없습니다. 매양 반록(頒祿)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군자시(軍資寺)의 저장한 것을 사용하여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니, 창고가 비고 군사 양식이 부족합니다. 신 등은 듣자오니, 조정에 요행으로 차지한 벼슬이 없게 되면 먹는 자가 적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 직책이 없이 녹을 먹는 자가 백 수십여 인이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남편이 큰 훈로(勳勞)가 있어 이미 불차 탁용(不次擢用)034) 하고 또 토전(土田)과 노비[臧獲]를 주었으니, 공을 갚는 은전(恩典)이 이미 후한 것입니다. 어찌 또 부녀로 하여금 같이 녹을 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검교의 직책과 부녀의 녹을 일체 정지하여 파하소서.
1. 왕자(王者)의 도(道)는 선(善)한 말 한 마디로 족히 만세에 모범을 남길 수 있고, 잘못된 행실 하나로 천고에 능멸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간혹 사과(司過) 두 사람을 임금 좌우에 두어서 잘잘못을 기록하게 하였는데, 지금 문하부(門下府)의 낭사(郞舍)의 직책을 좌우(左右)로 이름한 것이 대개 그 예입니다. 좌우에 있는 친근한 직책으로서도 전하의 언행의 잘잘못을 참여하여 듣지 못하니, 그 벼슬을 비워 두고 그 녹을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까? 신 등이 들으니, 경연(經筵)의 제도는 도학(道學)을 강명(講明)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대 흥망의 자취도 강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선(善)한 것은 법이 될 수 있고, 악한 것은 경계가 될 수 있어, 족히 그 선한 마음을 용동(聳動)시키고 방종한 뜻을 징계할 수 있다 하옵니다. 지금 경연관은 다만 귀두(句讀)만 알아 도학의 종지(宗旨)도 강명(講明)하지 않고, 역대의 자취도 진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시나 성학(聖學)에 도움이 없으니, 경연 강관(講官)의 직책을 대단히 잃은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매양 경연에 나아가시면 대간(臺諫) 한 사람으로 하여금 교대하여 입시하게 하고, 또 경연관으로 하여금 치도(治道)를 강론하게 하여, 날이 기운 뒤에 파하소서.
1. 타구(打毬)035) 의 놀이는 망한 원(元)나라 때에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고 황음(荒淫)하여 행하던 것입니다. 도흥(都興)·유운(柳雲)·김사행(金師幸) 등이 망한 원나라에 들어가서 벼슬하다가 그 일을 보고서는, 마침 태상왕의 창시(創始)하는 초기를 당하여 진언(進言)하기를, ‘인군이 궁중에 처하여 만일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데는 타구(打毬)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즉시 그 술책을 행하여 총행(寵幸)을 입었으니, 윗사람의 뜻을 맞춘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김사행은 이미 벌써 천주(天誅)를 받았거니와, 도흥·유운 등도, 바라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을 거두고 외방에 내쫓게 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또 전하께서 대업을 이어받으시어 마땅히 선왕(先王)의 도(道)를 본받을 것이지, 어찌 망한 원나라의 하던 짓을 본받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타구(打毬)하는 놀이를 행하지 마시고,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예(禮)대로 절제하소서.
1. 옛적에 당나라 태종(太宗)이 위징(魏徵)에게 이르기를,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택하는 것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군자 한 사람을 쓰면 군자가 모두 이르고, 소인 한 사람을 쓰면 소인이 다투어 나온다’ 하였는데, 위징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에는 오로지 그 재주만 취하고 그 행실을 돌보지 않지마는, 난국이 평정된 뒤에는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태상왕께서 창시하던 처음에는 국보(國步)036) 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망(輿望)을 거두기 위하여 다만 재주만을 취하고, 대간(臺諫)의 고신법(告身法)을 고쳐서 비로소 관교(官敎)037) 의 제도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마구 나와서 조정의 반열에 섞여 있으므로, 염치를 잃어 선비의 기풍이 진작되지 못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원하건대, 관교(官敎)의 폐단을 고치고 고신(告身)의 법을 회복하여 선비의 기풍을 권면하소서.
1. 상의원(尙衣院)은 전하(殿下)의 내탕(內帑)이므로, 의대(衣帶)·복식(服飾)의 물건을 일체 모두 관장(管掌)하는데, 다만 간사한 소인의 무리로 하여금 맡게 하여 절도없이 낭비하는 데에 이르니, 이제부터 공정하고 청렴한 선비를 뽑아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소서.
1. 나라는 백성으로 보존되고 백성은 신(信)으로 보존되오니, 신(信)이라는 것은 인군의 큰 보배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던 처음에 별안색(別鞍色)038) 은 그 폐단이 작지 않다고 하여 공조에 합하고, 중외(中外)에 유고(諭告)하시니, 민중들이 모두 기뻐하여 복종하였는데, 아직 1년도 못되어서 다시 세우시니, 진실로 백성에게 신(信)을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 공조의 직책은 백공(百工)을 총괄하여 왕사(王事)에 이바지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별안색을 혁파하여 영구히 공조에 붙이소서.
1. 재상의 직책은 도(道)를 논(論)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음양(陰陽)을 섭리(爕理)하는 것뿐이요, 전곡(錢穀)을 출납하는 등, 세세한 사무 같은 것은 유사(有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상왕이 즉위하신 처음에는 사사(使司)의 공응(供應)하는 임무를 예빈시(禮賓寺)에서 주장하고, 국용(國用)의 전곡의 수는 삼사(三司)에서 관장하였으니, 대신을 공경하는 까닭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사사(使司)에서 둔 지응고(支應庫)를 혁파하고, 거기에 저축한 전곡(錢穀)은 예빈시(禮賓寺)로 옮겨 국용(國用)에 대비하게 하소서.
1. 고금(古今)의 제왕(帝王)이 간고(艱苦)에서 성공하고 연안(宴安)에서 실패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혹은 식사할 겨를이 없었던 이도 있었고, 혹은 새벽부터 불을 밝히고 앉아서 조회(朝會)를 기다려 정치를 부지런히 한 이도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대업(大業)을 계승하셨으니, 진실로 마땅히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말아서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아일(衙日)마다 조례(朝禮)만 받으시고 스스로 청정(聽政)은 하지 않으십니까? 옛적에 노 문공(魯文公)이 네 번씩이나 초하루 조례를 보지 않으니, 이를 《춘추(春秋)》에 써서 만세에 경계를 남겼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아일(衙日)마다 각사(各司)로 하여금 평결(平決)한 여러 사무를 장본(狀本)을 갖추어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임금이 읽다가 격구(擊毬)의 일에 이르러서 노여움이 심하여, 좌간의(左諫議) 안노생(安魯生)을 불러 힐난하기를,
"언관(言官)의 직책으로 곧은 말을 하는 것은 가하나, 내가 하는 일을 가지고 부왕(父王)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이 가하냐?"
하고, 장무(掌務) 기거주(起居注) 박수기(朴竪基)에게 일을 보지 말라고 명하고, 소장(疏狀)을 머물러 두고 내려주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47면
-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행정(行政) / 재정(財政) / 풍속(風俗)
- [註 034]불차 탁용(不次擢用) :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초자(超資)하여 벼슬에 올려 쓰던 일.
- [註 035]
타구(打毬) : 격구(擊毬).- [註 036]
국보(國步) : 나라의 운명.- [註 037]
관교(官敎) : 조선조 태조(太祖) 때 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할 경우에는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거치지 않고 바로 벼슬을 주던 제도.- [註 038]
별안색(別鞍色) : 궁중에서 말안장의 제조(製造)를 맡아보던 임시 관아. 후에 공조에 소속됨.○〔庚午〕 /門下府上疏, 陳時務十事, 不允。 疏曰:
一, 孝者, 萬善之原, 百行之本。 堯、舜之道, 不越是矣。 太上王春秋已高, 宜勤視膳問安之職。 願自今, 一依唐 太宗奉養太上之制, 置太上王宮於城中, 號曰太安宮, 日勤問安, 垂範萬世。 一, 太上王尊爲國君之父, 而殿下以一國之富, 奉事焉, 其奉養之道, 不爲不厚。 願自今, 其宮中執事, 定額數擇良能, 以幹其事。 其侍從者, 擇耆舊夙有名望者, 更迭入侍, 又令節制使輪番侍衛, 僧徒奴隷之輩, 毋得擅自出入。 一, 古者聖王, 設官制祿, 各有其職, 未有無其職而食其祿者也。 方今以老病, 而不宜職事者, 皆授檢校。 不任其職, 坐耗天祿, 殆非先王設官制祿之義也。 自今大小臣僚年七十者, 許令致仕, 各就私第, 雖未至七旬, 而不宜職事者, 亦不許檢校之職。 且古禮, 婦人無外事, 尤不當受職。 今者翁主十九, 宅主五十二, 國夫人四, 女官九人, 摠計八十四人, 坐食天祿, 無益於國。 每當頒祿之際, 必用軍資所儲, 充其不足, 倉廩虛竭, 軍餉不足。 臣等竊聞, 朝無幸位, 則食者寡矣。 安有無其職而食祿者, 至於百數十餘人乎? 其夫有大勳勞, 旣已不次擢用, 又錫之土田臧獲, 報功之典, 固已厚矣。 豈可又令婦女, 竝受其祿乎? 其檢校之職、婦女之祿, 一切停罷。 一, 王者之道, 一言之善, 足以垂範萬世; 一行之失, 足以貽欺千古。 古者或以司過二人, 置諸左右, 以記得失。 今門下府郞舍之職, 以左右名之, 蓋其例也。 以左右親近之職, 不得與聞殿下言行之得失, 無乃曠其官而尸其祿乎? 臣等竊聞, 經筵之制, 非惟講明道學, 歷代興替之迹, 無所不講。 故善可爲法, 惡可爲戒, 足以聳動其善心, 懲創其逸志。 今者經筵官, 但知句讀, 不講道學之宗, 不陳歷代之迹, 故雖殿下日御經筵, 無補於聖學, 殊失經筵講官之職。 願自今, 每御經筵, 令臺諫一員, 更迭入侍, 又令經筵官, 講論治道, 至于日昃乃罷。 一, 打毬之戲, 其在殘元君臣失道荒淫之所爲也。 都興、柳雲、金師幸等, 游事殘元, 得見其事, 適値太上王創始之初, 進言曰: "人君處於宮中, 苟不運身, 必生疾病。 運身之利, 莫如打毬。" 乃行其術, 得蒙寵幸, 逢迎之罪, 莫大於斯。 師幸旣伏天誅, 其都興、柳雲等, 望令攸司, 收其職牒, 屛斥于外, 以戒後來。 且殿下纉承大業, 宜法先王之道, 何效殘元之所爲乎? 願自今, 毋行打毬之戲, 一動一靜, 節之以禮。 一, 昔唐 太宗謂魏徵曰: "爲官擇人, 不可造次。 用一君子, 則君子皆至; 用一小人, 則小人競進矣。" 對曰: "然。 天下未定, 則專取其才, 不顧其行, 喪亂旣平, 則非才行兼備, 則不可用也。" 我太上王創始之初, 國步未定, 故要收輿望, 但取其才, 革臺諫告身之法, 始有官敎之制, 賢愚冒進, 雜處朝班, 棄廉亡恥, 士風不振, 于玆有年。 願革官敎之弊, 復告身之法, 以勵士風。 一, 尙衣院, 是爲殿下之內帑, 衣帶服飾之物, 一皆掌之, 但以憸小之徒, 掌其事, 以至枉費無度。 自今擇公廉之士, 以監其事。 一, 國保於民, 民保於信。 信者, 人君之大寶也。 殿下踐祚之初, 謂別鞍色, 其弊不小, 合於工曹, 諭告中外, 衆皆悅服。 曾未期年而復立, 固非示信於民也。 工曹之職, 摠百工以供王事。 自今革別鞍色, 永屬工曹。 一, 宰相之職, 論道經邦, 燮理陰陽而已。 如出納錢穀等細務, 有司存焉。 是以太上王卽位之初, 使司供應之任, 禮賓主之, 國用錢穀之數, 三司掌之, 所以敬大臣也。 自今革使司所置支應庫, 其所貯錢穀, 移於禮賓, 以備國用。 一, 古今帝王, 莫不得之於艱難, 失之於宴安。 故或有不遑暇食, 或有昧爽丕顯, 坐以待朝, 以勤政治。 殿下旣承大業, 誠宜夙夜匪懈, 以成至治。 奈何每衙日, 但受朝禮, 不自聽政? 昔者魯文公, 四不視朔, 筆之《春秋》, 垂戒萬世。 願自今每衙日, 令各司將平決庶務, 具本啓聞。
上讀至擊毬之事, 怒甚, 召左諫議安魯生詰之曰: "言官之職, 直言可也。 予之所爲, 歸咎父王可乎?" 命掌務起居注朴竪基勿視事, 留狀不下。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47면
-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행정(行政) / 재정(財政) / 풍속(風俗)
- [註 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