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좌사의 대부 문익점의 졸기. 목화씨를 우리 나라에 처음 들여와 재배하게 된 내력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경자년068) 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胡]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緜)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을묘년069) 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본국의 조정에 이르러 의사(議事)하는 사람의 말로써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강성군(江城君)으로 증직(贈職)하였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이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28면
- 【분류】인물(人物)
○丁巳/前左司議大夫文益漸卒。 益漸, 晋州 江城縣人。 父淑宣登第不仕, 益漸承家業讀書。 恭愍庚子, 登科, 調金海府司錄。 癸卯, 以諄諭博士, 陞左正言, 爲計稟使左侍中李公遂書狀官, 赴元朝。 將還, 見路傍木緜樹, 取其實十許枚, 盛囊以來。 甲辰, 至晋州, 以其半與鄕人典客令致仕鄭天益, 種而培養, 唯一枚得生。 天益至秋取實至百許枚, 年年加種, 至丁未春, 分其種以給鄕里, 勸令種養。 益漸自種, 皆不榮。 胡僧弘願到天益家, 見木緜感泣曰: "不圖今日, 復見本土之物。" 天益留飯數日, 因問繰織之術, 弘願備說其詳, 且作具與之。 天益敎其家婢, 織成一匹。 隣里傳相學得, 以遍一鄕, 不十年, 又遍一國。 事聞, 洪武乙卯, 召益漸爲典儀注簿, 積官至左司議大夫。 卒年七十。 至國朝, 以議者之言, 贈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 子三, 中庸、中實、中啓。
- 【태백산사고본】 3책 1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28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