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절 계본을 잘못 쓴 3사람을 추가 압송하라는 예부의 편지와 조서 및 곽해룡의 문초장
억류당한 사신 조서(曺庶)의 종인(從人) 최녹(崔祿)이 예부 시랑(禮部侍郞) 장병(張炳)의 서신과 조서(曺庶)와 곽해룡(郭海龍)의 초장(招狀)을 가지고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그 서신에 말하였다.
"대명(大明)의 예부 시랑(禮部侍郞) 장병(張炳)은 조선 국왕에게 뜻을 전달합니다. 지난번 우리 지존(至尊)042) 께서 보위(寶位)에 올라 건부(乾符)043) 를 잡아 중국을 통일하고 원(元)나라를 대신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보내어 사이(四夷)의 나라에 빨리 알렸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고려 국왕이 즉시 사신을 보내어 이웃나라와 서로 화목하는 교제를 맺게 했으니, 비록 신하라 일컫고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하지마는, 실상은 화친하기를 청하여 삼한(三韓)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황제께서는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을 위안하게 되니, 어찌 즐거이 군대로써 천하에 강함을 보이겠습니까? 고려 국왕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후에 간절히 예의(禮儀)와 상헌(常憲)을 준수(遵守) 시행하겠다고 청하므로, 우리 황제께서는 거듭 유시(諭示)하기를, ‘예의는 본디 풍속대로 따라 하고, 법은 예전에 시행하던 전장(典章)을 지켜라.’고 한 지가 지금 수십 년이나 되었는데,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하지 말도록 간절히 경계하고, 일찍이 군대가 그대 나라보다 강한 것으로써 강제로 약속시키지는 아니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왕은 전대의 왕인 왕씨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왕노릇을 하여 임금이 된 지가 또 몇 해가 되었는데, 그 변방의 흔단을 발생시키지 말라는 유시(諭示)를 왕께서는 일찍이 자세히 들으셨는지 미심하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왕이 즉위한 이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말과 변방을 소란시킨 흔단(釁端)으로써 불화의 원인을 만들어, 입공(入貢)하는 사자(使者)로써 가칭(假稱)하고서 우리의 변방 관수(官守)를 몰래 달래고 재물로써 우리의 무지(無知)한 관원에게 뇌물을 쓴다는 말을 이미 들었는데,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한(漢)·수(隋)·당(唐)·요(遼)·금(金)·원(元)나라 등 이 몇 세대(世代)에서는 삼한(三韓)을 주재하는 사람이 겨우 약간의 불화(不和)만 있더라도, 그 전대의 여러 황제들은 분연(奮然)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 백성들이 해를 입었으니, 또한 작은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은 비록 예전이지마는 전쟁으로 인한 재화를 고요히 생각해 보건대, 누가 마음이 선뜩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왕이 불화(不和)한 일을 거듭 발생시키는데도, 우리 황제께서 또 장차 천신(天神)·지기(地祇)에게 밝게 고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감히 혈기(血氣)의 용맹으로써 일을 처리하지 않는 것은 다만 피차간(彼此間)에 백성이 상함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옛날 사람은 영(令)을 포고(布告)하고 문사(文詞)를 진술하였는데, 화목에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먼 지방을 정벌하는 데는 감히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은 자주 우리 조정에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켰으므로, 우리 황제께서는 변방 흔단의 근심으로 인하여 이미 사자(使者)를 보내 해악(海岳)과 산천(山川)에 한 차례 제사를 지내어 고하게 하였습니다. 저나라의 엄인(奄人)044) 이 돌아가서 이미 왕에게 알게 하였는데도, 지금 왕은 사람과 신(神)도 모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예전에 남의 나라를 찬탈(簒奪)하는 것으로써 기특한 일로 여겨 천명(天命)이 있음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오로지 속임수로써 정상(正常)으로 여기는데, 중국이 그대의 삼한(三韓) 나라와 매우 가까우니 이륜(彝倫)의 도리가 조금이라도 틀린 점이 있다면 어찌 책망하지 않는 예절이 있겠습니까? 비록 이와 같이 책망하더라도 실상은 곧 신하로서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음을 가르친 것인데, 왕은 이에 그 책망한 것을 싫어하여 오로지 원수로 여기고 몰래 모욕함이 끊이지 않으니, 만약 그대의 하는 대로 따른다면 왕의 나라는 오로지 이런 꾀만 숭상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신하의 직분을 지키지 않는 것을 가르쳐 그 꾀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왕과 같은 사람이 잇달아 서로 이르게 된다면 왕이 비록 왕위에 있더라도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지금 왕을 시종(侍從)하는 무리들은 모두 경박하고 경험이 없는 서생(書生)으로서 도리로써 왕을 도우지는 아니하고, 모두 중국 성현(聖賢)들의 경전(經傳)을 표절(剽竊)하여 원작자의 본의(本意)는 무시하고 자기의 소용되는 부분만을 따서 마음대로 해석하여 뒤집어 희롱하고 모욕하는 문사(文詞)를 만들어 천신(天神)·지기(地祇)에게 죄를 얻었으니, 또한 어찌 속죄(贖罪)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서(曺庶)의 공술(供述)한 것도 오히려 집필(執筆)에 함께 모의하여 상모(相侮)한 사람 3명이 있으므로, 특별히 왕에게 뜻을 전달하니, 왕은 그것을 살펴서 보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서(曺庶)의 문초장(問招狀)에는 말하였다.
"본국(本國)에 전 예조 정랑(禮曹正郞) 윤규(尹珪)와 성균 사성(成均司成) 공부(孔俯) 및 예조 정랑 윤수(尹須)가 있었는데, 나 조서(曺庶)와 모두 수재(秀才) 출신이다. 홍무(洪武) 30년 8월 무렵에 윤규(尹珪) 등이 나 조서(曺庶)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지난해에 대명(大明)의 황제가 우리의 찬술(撰述)한 전문(箋文)을 가져가고 김약항(金若恒)이 북경(北京)에 달려갔었는데, 지금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돌아와서, 「대명(大明) 황제(皇帝)가 김약항(金若恒)을 억류해 두고 놓아보내지 아니한다. 이상하게도 우리가 진상(進上)한 말안장[鞍子]을 모두 부셔버리고 그들 몇 사람을 좋게 놓아보내지 아니한다.」고 이야기하더니, 지금 〈황태자〉 전하(殿下)의 11월 천추절(千秋節)에는, 「우리 왕이 좋게 예물(禮物)을 가져가서 바칠 것이면 반드시 계본(啓本)을 요구할 것이니, 우리는 상량(商量) 계교(計較)하여 몇 개 음동(音同)한 글자를 골라서 계본(啓本)의 이면(裏面)에 꽂아 넣어, 중국(中國)에서 훌륭한 수재(秀才)가 있어 이것을 알아내는가를 보자.」고 각 사람이 합의하고, 전하(殿下)의 천추 계본(千秋啓本) 안에 짐짓 천추절사(千秋節使)의 자(字)를 써서 기모(譏侮)를 하고는,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유호(柳灝)와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정안지(鄭安止) 및 타각부(打角夫) 최호(崔浩)를 시켜 계본(啓本)을 가지고 경사(京師)로 가게 하였더니, 뜻밖에 본년(本年) 12월 19일에 원근(原根)이란 차사(差使)가 유호(柳灝)의 경사에 갈 때의 타각부(打角夫) 최호(崔浩)와 함께 예부 문서(禮部文書)를 가지고 와서 계본(啓本)을 짓고 쓴 사람의 해답을 요구하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 같이 상의(商議)하여 계본(啓本)을 지어 기모(譏侮)를 한 사람으로서 윤규(尹珪)·공부(孔俯)·윤수(尹須)가 왕과 원근(原根)의 앞에서 사유의 전말을 알려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 네 사람이 상의(商議)해서 짓고 쓰는 중간에 모든 것이 이 조서(曺庶)가 주장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왕은 본월 25일에 이르러 사역원사(司譯院事) 곽해룡(郭海龍)을 불러 나 조서(曺庶)를 압송(押送)한 것이다. 그 당시 왕은 곽해룡에게 분부(分付)하기를, ‘너는 그전에 북경(北京)에 여러 번 가서 그곳의 언어를 잘 알 것이므로, 지난해 너를 시켜 김약항(金若恒)을 호송하여 경사(京師)로 가게 한 것이다. 후에 사신 노인도(盧仁度)·정총(鄭摠)·오세겸(吳世謙)이 경사에 갔었는데 돌려보내지 아니하니, 그 곳에서 그들을 억류하여 길잡이로 만들어서 우리 땅을 정벌해서 취해 갈 것을 방비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너를 시켜 조서(曺庶)를 반송(伴送)하여 경사(京師)에 보내니, 만약 그들을 보거든 자세한 것을 듣고 돌아와서 나에게 알려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곽해룡을 시켜 조서 나를 반송(伴送)하여 북경에 이르러 해답을 하고 소식을 들어 보도록 한 것이다."
지금 예부(禮部)에서 보내 온 조서(曺庶)의 문초장(問招狀)은 실제 그러했고, 그 곽해룡(郭海龍)의 문초장(問招狀)도 모두 조서의 것과 서로 같았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22면
- 【분류】외교-명(明)
- [註 042]
○被留使臣曺庶從人崔祿, 齎禮部侍郞張炳書及曺庶、郭海龍招狀, 回自京師。 書曰:
大明禮部侍郞張炳致意于朝鮮國王。 曩者, 我至尊卽寶位, 握乾符統中夏, 代元爲君。 由是遣使飛報四夷, 故高麗國王卽遣使以修睦隣之好。 雖曰稱臣入貢, 實乃請和, 以妥三韓之生靈也。 然我至尊, 奉天勤民, 豈肯以兵强天下? 諭之曰: "毋生邊釁。" 後懇切以請, 禮儀常憲, 遵守施行, 我至尊固諭之曰: "儀從本俗, 法守舊章。" 今數十年矣。 自始至今, 切戒毋生邊釁, 未嘗以兵强爾國, 强爲約束。 今王代前王王氏爲君, 又幾年矣。 其毋生邊釁之諭, 未審王曾諦聽者乎? 雖然自王卽位以來, 以釁隙之言、擾邊之釁, 已聞搆釁之原。 假以入貢使者, 暗說我邊守, 以財賄賂我無知。 以此觀之, 漢、隋、唐、遼、金、元此數代, 其主宰三韓者, 纔有微釁, 其前諸帝, 奮然興師, 其生靈受害, 又非淺淺事。 事雖往古, 靜思兵禍, 孰不寒心! 今王疊生釁隙, 我至尊又將昭告于上下神祇, 何也? 非敢以血氣之勇爲之, 惟恐彼此有傷生靈, 故不爲也。 況古人布令陳詞, 而不循於和睦者, 尙不敢勤兵於遠征。 今王數數生邊釁於我朝, 我至尊因邊釁之憂, 已遣使祭告于海岳山川一次矣。 彼國奄人歸, 已令王知, 今王人神皆不畏。 是以昔者, 簒人之國爲奇, 不以有天命之爲懼, 專以譎詐爲常, 中國與爾三韓密邇, 彝倫之道, 纔有訛謬, 安有不責之於禮乎! 雖責之如是, 實乃敎人臣不敢妄爲。 王乃惡其所責, 專以爲讎, 暗侮不絶。 若從爾所爲, 王國專尙此謀, 敎人不臣, 謀爲不已。 如王者繼踵相至, 王雖在位, 亦何益哉? 今從王之徒, 皆輕薄白面書生, 不以道助王, 皆剽竊中國聖賢經傳, 斷章取義, 翻作戲侮之詞, 得罪于上下神祇, 又何贖哉? 今曺庶所供, 尙有執筆同謀相侮者三人, 特致意于王, 王其審之發來。 其曺庶狀招曰: "有本國前禮曹正郞尹珪、成均司成孔俯、禮曹正郞尹須, 與曺庶, 俱係秀才。 洪武三十年八月間, 有尹珪等對庶言說: ‘去年大明皇帝, 取俺每撰箋的金若恒每赴京去了。 如今有判三司事偰長壽回來說: 「大明皇帝都留下不放, 他每回來好生怪, 俺每這裏將進的鞍子, 都拆毁了, 他每這幾箇好歹不放回來。 如今殿下十一月千秋, 俺每王好歹將禮物去進, 必要啓本, 俺每這裏商量計較, 尋幾箇音同的字樣, 安在裏面, 看中國可有好秀才看得出來。」’ 各人依聽, 商議於殿下千秋啓本內, 故寫千秋節使字樣譏侮, 差判典儀寺事柳灝、司譯院判官鄭安止、打角夫崔浩齎進赴京。 不期本年十二月十九日, 有原根差同柳灝赴京打角夫崔浩齎禮部文書回還, 要作寫啓本的人來回話。 當有同商議作啓本譏侮人尹珪、孔俯、尹須, 却於王根前告說, 然是俺每四箇商議, 作寫中間, 都是曺庶主張。 有王至本月二十五日, 喚司譯院事郭海龍, 押送庶。 當分付郭海龍: ‘爾曾赴京多遍, 好生省得那裏言語, 去年差爾送金若恒赴京。 後使臣盧仁度、鄭摠、吳世謙赴京, 不見發回, 恐防那裏留下他, 每引路征取俺每地方。 如今差爾伴送曺庶赴京, 若見他每討箇仔細回來, 與俺知道。’ 以此就差郭海龍, 伴送到京回話打聽。" 今蒙送問招狀是實。
- 【태백산사고본】 3책 1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22면
- 【분류】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