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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4월 17일 기해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사은사(謝恩使)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부사(副使)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신유현(辛有賢)·전 의주 도절제사(義州都節制使) 진충귀(陳忠貴)·전 호조 전서(戶曹典書) 양천식(楊天植) 등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전하였다. 자문은 이러하였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또 자문에 말하였다.

"본부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나라를 열고 가업(家業)을 이음에 있어서 소인(小人)은 쓰지 말아야 하는데, 조선은 새로 개국하여 등용된 사람의 표전(表箋)을 보니, 이것은 삼한(三韓) 생령(生靈)의 복이 아니요, 삼한의 화수(禍首)이다. 옛날 중하(中夏)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아 땅을 벌려 차지한 자가 만국(萬國)이지만, 능히 녹(祿)이 자손에게 미치어 대대로 그 땅을 지킨 자가 드물었다. 무슨 까닭인가? 소인이 곁에 있어 구벌(九伐)의 법을 쓰게 된 까닭이다. 천조(天朝)로 더불어 아름다움을 같이한 것은 두어 나라뿐이니, 저 정(鄭)나라는 한 작은 나라였다. 처음에 사람 쓰는 것이 마땅치 못하여 매양 군사의 정벌을 받았는데, 뒤에 자산(子産)정나라의 정승이 되매, 군자로구나. 자산이여! 무릇 이문(移文)에 대하여 제후(諸侯) 방백(方伯)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말을 함부로 발하지 않고 뜻이 어긋나고 어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산의 몸을 마치도록 병화가 없었으니, 무슨 때문인가? 대개 제후·방백에게 성의를 펴서 깊이 생각하고 익히 상량하여 붓을 내리기를 정미하게 하였기 때문에, 초창(草創)·토론(討論)·수식(修飾)·윤색(潤色)이 있었고, 이렇게 한 뒤에야 행하니, 어찌 한 글자라도 남에게 모만(侮慢)하려고 하는 것이 있겠는가? 지금 조선 국왕 이(李) 【휘(諱).】 의 문인(文人)인 정도전(鄭道傳)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왕이 만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다. 지금 정총(鄭摠)·노인도(盧仁度)·김약항(金若恒)이 만일 조선에 있다면 반드시 정도전의 우익(羽翼)이 되었을 것이니, 곧 이들로 인하여 이미 화를 불러 그 몸에 미쳤을 것이다. 왕은 살피지어다. 만일 정하게 살피지 않으면 나라의 화가 또 장차 발하여 남에게 손을 빌릴 것이다. 너희 예부는 조선 국왕에게 이문하여 깊이 생각하고 익히 상량하여 삼한을 보전하게 하라’ 하였다."

설장수(偰長壽)가 또 선유(宣諭)를 전하였다.

"2월 초2일에 황제가 우순문(右順門)에 나아가 장수(長壽) 등을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성혼하는 일은 너희가 현재 효복(孝服) 중에 있으니, 종제(終制)하는 것을 기다려서 후년 정월에 사람을 보내어 가서 혼사를 정하겠다. 이모(李某)는 분간할 줄을 모른다. 정도전을 써서 무엇을 할 것이냐? 정총(鄭摠)은 전일 한림원(翰林院)에다 써서 주기를, 「왕비가 작고하였으니 자최를 입겠다.」고 하였다. 회답하기를, 「본국에 비록 상사가 있더라도 조정에서는 그리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런데도 뒤에 연절(年節)에 이르러 흰옷을 입고 궐내에 들어왔다. 또 압록강(鴨綠江)이란 시를 지었는데, 용만(龍灣)이 소색(蕭索)하다고 말하였다. 물으니, 「압록강용만이 있다.」 하였다. 정도전은 여기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산해위(山海衛)에 지나다가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를, 「(명과 사이가) 좋아지면 좋은 것이고, 안 좋아지면 와서 부딪치겠다.」 고 하였다. 너희 나라에서 온 화자(火者)는 내 궁원(宮院) 안에서 왕래하고, 내가 거처하는 곳에서 먹는 음식을 모두 보살피는데, 제 부모를 만나 보기를 요구하기에, 내가 「갔다 오라.」고 말하고, 은자(銀子)를 모두 주었다. 제가 부모가 있으면 제 부모에게 편지나 보내면 그만이지 장차 거기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 사람의 몸에 한 개의 푸른 물건, 한 개의 붉은 물건, 한 개의 유목권자(柳木圈子)를 지녔는데, 권자를 열어 보니, 그 속에 한 장의 종이가 있어 서번(西蕃) 글자를 가득 썼다. 지금도 그 근방에 약간의 달자(達子)가 있는 모양이니, 내가 가서 그것을 정벌할 터인즉, 너희가 만일 2만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가서 힘을 쓴다면 내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겠다. 너희가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오시(午時)에 우순문에 이르러 선유하기를, ‘먼젓번 안자(鞍子)를 열어 보니 속에 글자를 썼는데, 내가 또 네가 가져온 안자를 열어 보면 어떠할지는 모르겠다.’ 하매, 여러 내관(內官)이 제각기 열은 안구(鞍具)를 내었는데, 하나는 안시판(雁翅板) 위 좌우에 모두 거꾸로 천자(天字)를 섰고, 하나는 안장 속에 현자(玄子)를 썼고, 하나는 얹는 곳에 십자(十字)를 썼었습니다. 황제가 일어서서 친히 손으로 잡아 보고 다시 앉아서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어째서 이렇게 나를 무시하는가? 그 속에 문자를 쓴 중에 다만 천자(天字)를 모두 첫머리에 썼으니 이것은 내가 탈 수 없다.’ 하였습니다. 장수(長壽)가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바친 안자(鞍子) 속에서 자호(字號)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 안자를 영수할 때에 두세 번 맡아서 만든 사람에게 물으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에, 신이 마음놓고 가지고 왔습니다. 맡아서 만드는 사람이 으레 자호(字號)를 붙이어 품제(品第)을 표하고 다 장식한 뒤에는 곧 긁어 없애는데, 지금 관조(管造)한 사람이 잊고서 긁어버리지 않았으니 죄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신이 고려(高麗)에 귀화한 지가 지금 40년인데, 공민왕(恭愍王)은 말할 것도 없고, 중간의 두세 임금도 신이 감히 그 지성을 보증하지 못하지마는, 지금 임금은 한마음으로 위를 공경하여 감히 태만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네 말이 주인을 배반하려 하지 않는 것은 옳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 속에 조금도 성의가 없으니 어떻게 감히 혼사를 정하겠는가? 감히 못하든지 하려고 하지 않든지 간에 나는 사실로 정혼을 하려 하였는데, 저쪽에서 저렇게 무성의하니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정총(鄭摠)의 가속의 공술하는 말과 딴 부인의 공술하는 말이 다르고, 연월일이 모두 같지 않으니, 어찌 그의 가속이겠는가? 이 가속은 모두 데려가라. 너의 사은하는 말[馬]은 혼사가 이미 성립되지 않아서, 머물러 두기 어려우니 가지고 가라. 안자(鞍子)는 마감(馬監)을 시켜 태워버렸다. 금자(金子) 57냥은 가지고 가라. 네가 왕에게 흔단을 내지 말라고 말하라. 소인의 농간을 들으니 다음날에는 일을 망칠 것이다. 의주 만호(義州萬戶)는 본래 법사(法司)에 보내어 대질하여 묻는 것이 합당하지마는, 이(李) 【태조의 휘(諱).】 가 너희를 보내어 왔으니 그 뜻이 좋다. 내가 묻지 않고 너희를 놓아 돌려보낸다. 그러나 금후로는 조심하여 일을 내지 말라.’ 하고, 인하여 천하를 얻는 이유를 갖추 설명하여 말하기를, ‘네 임금이 나라를 얻는 것도 역시 이것과 같을 것이다. 하늘이 주지 않고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힘으로 취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03면
  • 【분류】
    외교-명(明)

○己亥/謝恩使判三司事偰長壽、副使中樞院副使辛有賢、前義州都節制使陳忠貴、前戶曹典書楊天植等回自京師, 傳禮部咨, 曰:

本部欽奉聖旨: "中國周隣四夷, 遠近不等, 惟朝鮮密邇東陲, 比之他處, 甚爲切近。 前者, 王氏怠政而亡, 李氏新興, 數生邊釁, 朕與語再三, 終不能止。 恐久生兵禍, 實欲互爲姻親, 以妥兩國生民。 此意此慮, 已有年矣。 是以二十九年六月間, 但以行人, 以通此意。 使者歸, 聞王出迎, 朕將以爲必然姻親之事成矣。 三十年春, 朝鮮亦爲此事遣人, 至進鞍馬, 以表誠意。 次日驗鞍馬, 器獸皆疵。 觀物之所以, 初交尙此, 久必不然。 至君子良友各天一方, 將欲會而未能, 必千里神交而志通。 今朝鮮, 朕以誠往, 彼以詐應。 其千里神交而志通, 可乎? 事不斷其初, 後將必悔。 其朝鮮姻親之事, 難以再議。 爾禮部移文朝鮮, 罷姻親之議, 善待行人, 歸諭以毋生邊釁。"

又咨曰:

本部欽奉聖旨: "開國承家, 小人勿用。 朝鮮新造, 所用之人, 見在表箋, 此非三韓生靈之福, 乃三韓之禍首也。 曩古中夏受君命, 而列土者萬國, 能祿及子孫, 世守其土者罕矣。 何哉? 以其小人在側。 由是九伐之法用焉, 能與天朝同休者, 數國而已。 且, 一小國耳。 初用人未當, 每受兵征, 後子産, 君子哉子産! 凡所移文, 諸侯方伯, 無不相好, 以其言不妄發, 意不乖違。 終子産而無兵禍。 云何? 蓋能敷誠意於諸侯方伯, 深思熟慮, 下筆精微, 故有草創討論修飾潤色。 如此而後方行, 安肯一字而侮慢於人者也! 今朝鮮國王 諱所用文人鄭道傳者, 於王之助, 何爲也? 王若不悟, 斯人必禍源耳。 今鄭摠盧仁度金若恒, 若在朝鮮, 必鄭道傳之羽翼。 卽因各人已招, 禍及其身矣, 王其審之。 若不精審, 國禍又將發, 假手於人。 爾禮部移文朝鮮國王, 深思熟慮, 以保三韓。"

偰長壽又傳宣諭, 曰:

二月初二日, 帝御右順門, 引見長壽等曰: "做親事, 爾見在孝服中, 待終制後年正月, 交人去做親。 某沒分曉, 鄭道傳用他做甚麿? 鄭摠前日寫與翰林院, 道王妃歿, 要服齊衰。 他回道本國雖有喪事, 在朝廷不敢這般。 後到年節下都穿白衣入內, 又做鴨綠江詩, 說龍灣蕭索, 問之, 曰: "鴨江有箇龍灣。" 鄭道傳到這裏回去, 過山海衛對人說: ‘好便好, 不好來搶一場。’ 爾國來的火者, 我宮院裏走我睡處, 喫的膳都管。 他要看爺娘, 我敎他去回來, 恁都打發打銀子。 他旣有爺娘, 只合齎發他爺娘。 將來這裏做甚麿? 他身上帶著一介靑的物、一介紅的物、一介柳木圈子。 拆圈子裏有一張紙, 滿寫西蕃字。 如今比裏有些殘達子, 我見去征他。 爾若著二萬人馬, 去出氣力, 我一點兒不疑, 爾却肯麿?" 午時, 宣至右順門, 曰: "先番鞍子拆開, 裏頭寫著字樣, 我又拆爾將來鞍子, 不知如何。" 衆內官各將所拆鞍具進, 一面雁翅板上左右, 皆倒寫天字, 一介坐兒裏書玄字, 一面坐兒裏畫十字。 帝起立親手把看, 復坐曰: "他怎麿這般小道兒? 我這裏寫文書, 但是天字都題起頭寫, 早是我不曾騎。" 長壽奏曰: "臣聞先進鞍子裏, 拆出字號。 臣領這鞍子時, 再三問管造人, 他說竝無。 臣放心將來, 管造人例著字號, 以識品第, 旣裝了, 便行刮去。 今管造人忘不刮去, 其罪何量! 臣到高麗, 今四十年。 恭愍王不必說了, 中間兩三介王臣, 不敢保其至誠, 如今王一心敬上, 不敢怠慢。" 帝曰: "爾這說不肯背主則是。 和我這裏無一介至意, 如何敢做親! 不敢做不爭做。 我實實的做親, 他却這般不停當, 怎的成! 鄭摠的家小, 他供的詞因別, 婦人供的別, 年歲月日都不同, 豈是他家小? 這家小還交回去。 爾謝恩馬, 親事旣不成, 難留帶回去。 鞍子, 著御馬監燒了, 金子五十七兩將去。 爾說王休生釁, 聽小人撥弄, 明日弄壞了。 義州萬戶, 本合送法司對問。 【太祖諱。】 發爾來, 這意思好, 我不問爾放還。 今後小心, 休生事因。" 備說得天下之由曰: "汝君得國, 亦猶是也。 天不與人不歸, 則其可以力取哉!"


  • 【태백산사고본】 3책 1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03면
  • 【분류】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