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백 이색의 졸기. 여주 신륵사에서 죽다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여흥(驪興)012) 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조회를 정지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부의를 내려 주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색(穡)의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한주(韓州)013) 사람 정동행중서성 낭중 도첨의찬성사(征東行中書省郞中都僉議贊成事)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과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나이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지정(至正) 무자년(1348)에 이곡(李穀)이 원조(元朝)014) 의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색은 조관의 아들이라 하여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었다. 신묘년(1351) 정월에 곡(穀)이 본국에 돌아와 죽으니,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여 상제(喪制)를 마치고, 계사년 공민왕이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할 때는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 등이 색을 장원으로 뽑았다. 가을에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하였고, 갑오년(1354)에 회시(會試)에 합격하였으며, 전정(殿庭)에서의 대책(對策)에서 제2갑(甲) 제2명으로 합격하였다. 독권관(讀券官)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 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 등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여 칙지로 응봉 한림문자·동지 제고 겸 국사원 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고 귀국하자, 공민왕이 전리 정랑(典理正郞)·예문 응교 겸 춘추 편수(藝文應敎兼春秋編修)를 더하였다. 이듬해 내사 사인(內史舍人)에 오르고,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병신년(1356)에 모친이 늙었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와 가을에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임명되고, 다시 옮겨서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015) 로 임금을 가까이 한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경성(京城)016) 을 함락시켜 공민왕이 남행(南行)할 때, 색은 왕의 행행(行幸)에 호종, 도움을 이루어 적을 물리친 뒤에는 훈 1등에 책정되고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 계묘년에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원나라에서 임명받고, 본국에서는 밀직 제학(密直提學)을 임명받고 단성 보리 공신(端誠保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정미년에 원나라 정동성 낭중(征東省郞中)으로 제수되고, 본국에서는 판개성 겸 성균 대사성(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되었는데, 한때의 경술(經術)을 통하는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6, 7인을 천거하여 모두 학관(學官)을 겸했다. 경전을 나누어 수업을 하매 서로 어려운 것을 논란해서 각각 있는 지식을 다했다.
색은 변론하고 분석하며 절충하는 데 저물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억하고 외우기만 하는 습관과 공리(功利)의 학설이 점점 없어지고, 성리(性理)의 학문이 다시 일어났다. 기유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이인복(李仁復)으로 더불어 임금에게 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법을 쓰자고 했는데, 색이 무릇 공거(貢擧)를 주장한 지 네 번이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공정함을 탄복했다. 공민왕이 노국 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짓는데 말할 수 없으리만큼 사치하고 호화롭기가 지극하여,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상서(上書)하여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유탁을 죽이려 하고, 색을 시켜서 여러 신하들에게 알리는 교유문을 지으라 했다. 색이 죄명을 임금에게 물으니, 임금이 탁의 네 가지 죄목을 들었다. 색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죽일 만한 죄가 아닙니다. 원컨대, 깊이 생각하옵소서."
임금이 더욱 노하며 독촉하기를 급히 하였다. 색이 아뢰었다.
"신이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글로써 죄를 만들겠습니까?"
임금이 감동되어 깨우쳐 탁이 죽기를 면했다. 신해년에 모친의 상(喪)을 만났으나, 이듬해 임금이 기복(起復)시켜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삼았는데, 병이 있다고 사면하였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돌아갔다. 색이 병이 중해서 문을 닫고 7, 8년을 지내다가 우왕 8년 임술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고,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요동위(遼東衛)를 공격하자고 청하여, 우왕이 기로(耆老)와 양부(兩府)로 하여금 모여서 가부를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서 반대하는 자가 적고 좋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색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나, 물러 나와서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오늘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의리에 거스리는 논의를 했다."
고 하였다.
이 태조가 회군하자 최영을 물리치고 색으로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삼았다. 공민왕이 돌아간 뒤로 부터 〈원나라〉 천자가 번번이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들어오라고 해서, 모두 겁을 내고 감히 가지 못했는데, 색이 시중이 되어 폐왕(廢王) 창(昌)을 친히 조회하도록 하고, 또 창왕으로 감국(監國)을 시키도록 하려고 원나라에 들어가기를 자청하여, 드디어 색으로 하여금 하정사(賀正使)를 삼았다. 그리고 태조가 칭찬하여 말하였다.
"이 노인은 의기가 있다."
색이 생각하기를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해지고, 중외가 마음이 돌려져서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혹 변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한 아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는 전하(殿下)017) 로 서장관(書狀官)을 시켰다. 천자가 원래에 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인견하고 종용(從容)하게 하는 말이,
"그대가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해 한림 학사를 했으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리라."
하니, 색이 당황하여 한어(漢語)로 대답하기를,
"왕이 친히 조회하려 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뜻을 깨닫지 못학고 묻기를,
"무슨 말이냐?"
하매, 예부의 관원에게 전하여 주달하게 하였다. 색이 오래도록 조회하지 않았으므로 말씨가 대단히 간삽(艱澁)하니, 천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대의 한어는 정히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였다. 색이 돌아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내 마음으로 이것을 물으려니 하면 황제는 묻지 않고, 묻는 바는 모두 내 뜻과는 같지 않더라."
하니, 당시의 논의로 기롱(譏弄)하기를,
"큰 성인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어떻게 요량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공양왕이 즉위하였는데, 이색은 시론(時論)에 참예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섯 차례나 폄척(貶斥)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 옛날의 벗이라 하여 용서하니, 태조에게 나아가서 보고 올 때마다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천명을 받은 거룩한 임금님이시다."
하였다. 또 일찍이 영선(營繕)을 정지하기를 청하고는 물러 나와서 사람들이 묻는 일이 있으면,
"창업하는 임금은 종묘·사직과 궁궐이며 성곽 같은 것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고 했다.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 곳에서 거주하려 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 와서 한산백(韓山伯)을 봉했다. 색이 진현(進見)하고 하는 말이,
"개국하던 날 어찌 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 만일 알렸다면 읍양(揖讓)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마고(馬賈)018) 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배극렴(裵克廉)을 가리킨 것이었다. 남은(南誾)이 〈옆에 있다가〉 하는 말이,
"어찌 그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
하니, 임금이 은(誾)을 꾸짖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하고, 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하였다. 뒤에 〈이것을〉 논의하는 자가 있으므로, 남재(南在)가 색의 아들 이종선(李種善)을 불러서 하는 말이,
"존공(尊公)이 광언(狂言)을 하여 이를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오."
하였다. 병자년 5월에 신륵사(神勒寺)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갈 때에 병이 생겼다. 절에 가자 병이 더하니 중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색이 손을 내 흔들면서 하는 말이,
"죽고 사는 이치는 내가 의심하지 않으오."
하고, 말을 마치자 돌아갔다.
색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왔으며,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다. 사리를 처리하는 데 자상하고 밝아서, 재상이 되어 기성의 법을 따르는 데 힘을 쓰고 복잡하게 고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애를 쓰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만 잡으면 즉시 쓰되 사연이 정밀하고 간절했었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나왔다. 집을 위해서는 재산의 유무(有無)를 묻지 않았으며, 평시에 경솔한 말과 갑자기 노여워하는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 연회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도 여유있고 침착하여서 처사하는 데 난번되지 않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언동은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임금의 은총과 좋은 자리에 있었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변란과 불행을 만났으되 슬퍼하지도 않았다. 늙어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지공 대사(指空大師)019) 와 나옹 대사(懶翁大師)020) 의 부도(浮圖)에 명(銘)을 지었기로, 그 중들이 문하에 내왕해서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다.
색이 듣고 하는 말이,
"저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복을 기원해 주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하였다. 색의 아들은 세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 이종덕(李種德)과 둘째 아들 이종학(李種學)은 모두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으나 먼저 죽었고, 셋째 아들 이종선(李種善)은 지금 병조 참의가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책 91면
- 【분류】인물(人物)
- [註 012]여흥(驪興) : 지금의 여주.
- [註 013]
한주(韓州) : 지금의 한산.- [註 014]
원조(元朝) : 원나라.- [註 015]
후설(喉舌) : 승지(承旨).- [註 016]
경성(京城) : 개성.- [註 017]
전하(殿下) : 태종을 말함.- [註 018]
마고(馬賈) : 말 장수.- [註 019]
지공 대사(指空大師) : 고려 충숙왕 2년에 인도의 마갈타국(摩竭陀國)에서 온 도사(道師). 우리 나라에 와 법화(法化)를 펴고 왕사(王師)가 되었음.- [註 020]
나옹 대사(懶翁大師) :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 속성은 아(牙), 호는 나옹. 지공 화상(指空和尙)을 따라 심법(心法)의 정맥(正脈)을 받아 왔음. 지공·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의 하나.○韓山伯 李穡卒于驪興 神勒寺。 訃聞, 上輟朝, 致祭賜賻, 諡文靖。 穡字穎叔, 號牧隱, 韓州人, 征東行中書省郞中都僉議贊成事諡文孝公 穀之子。 自幼聰慧異常, 年十四, 中成均試。 至正戊子, 穀在元朝, 爲中瑞司典簿, 穡以朝官子, 補國子監生員。 辛卯正月, 穀還本國卒, 奔喪終制。 癸巳, 恭愍王設初科, 知貢擧李齊賢等, 擢穡爲魁, 秋, 中征東省解元。 甲午, 中會試, 對策殿庭, 中第二甲第二名。 讀券官參知政事杜秉彛、翰林承旨歐陽玄諸公, 大加稱賞, 勑受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 東歸須次, 王就加典理正郞、藝文應敎、兼春秋編修。 乙未, 陞內史舍人, 夏, 如京仕翰林院。 丙申, 以母老棄官東歸, 秋, 拜吏部侍郞, 再遷至右副承宣。 由是昵居喉舌凡七年。 辛丑, 紅賊陷京城, 王南行。 穡從王行, 弼成克復, 策勛一等, 賜以鐵券。 癸卯, 宣授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 拜本國密直提學, 賜端誠保理功臣之號。 丁未, 宣授征東省郞中。 以本國判開城兼成均大司成, 擧一時通經術者鄭夢周、李崇仁等六七人, 皆兼學官, 分經授業, 常與論難, 各盡其極。 穡辨析折衷, 竟夕忘倦。 於是, 記誦之習, 功利之說稍息, 而性理之學復興。 己酉, 同知貢擧, 與知貢擧李仁復請王, 始用中朝科擧之法。 穡凡主貢擧四次, 人服其公。 王構魯國影殿, 窮極侈麗, 侍中柳濯, 上書請止, 王怒, 欲誅濯, 命穡製諭衆文。 穡請罪名, 王數濯四罪。 穡對曰: "此非可殺之罪, 願更思之。" 王益怒, 促愈亟, 穡曰: "臣寧得罪, 安敢爲文, 以成其罪!" 王遂感悟, 濯得全。 辛亥, 丁母憂。 壬子, 王命起復政堂文學, 以疾辭。 甲寅, 王薨, 穡方疾篤, 杜門七八年。 壬戌, 拜判三司事。 戊辰, 崔瑩請攻定遼衛, 禑命耆老兩府會議可否, 皆希旨, 否者少而可者多。 穡亦附衆議, 退謂子弟曰: "今日我爲汝輩從逆義之論。" 及上回軍, 執退瑩等, 起穡爲門下侍中。 自恭愍之薨, 天子每徵執政大臣入朝, 皆畏懼不敢行, 及穡爲相, 欲廢王昌親朝, 又欲王官監國, 自請入朝, 遂以穡爲賀正使。 太祖稱之曰: "慷慨哉是翁!" 穡以太祖威德日盛, 中外歸心, 恐其未還乃有變, 請一子從行, 太祖以殿下爲書狀官。 天子素聞穡名, 引見從容語曰: "汝仕元朝爲翰林, 應解漢語。" 穡遽以漢語對曰: "親朝。" 天子未曉其志, 問曰: "說甚麽?" 禮部官傳奏之。 穡久不入朝, 語頗艱澁, 天子笑曰: "汝之漢語, 正似納哈出。" 穡還語人曰: "今皇帝, 心無所主也。 我意帝必問此事, 帝不之問, 而所問皆非我意也。" 時論譏之曰: "大聖人度量, 俗儒可得而議乎?" 冬, 恭讓王立。 穡以時論不與, 見貶至于五次, 及太祖卽位, 以故舊原之。 每進見, 退語子弟曰: "眞受命聖明之主也。" 又嘗請止營繕, 及退, 人有問之者, "創業之主, 廟社宮室官府城郭, 不可緩也。" 乙亥秋, 請遊關東, 入五臺山, 因欲留居, 上遣使召。 至, 封韓山伯。 穡進見曰: "開國之日, 何不使我知之? 我若知之, 當行揖讓之禮, 更有光矣。 豈(若)〔可〕 使馬賈爲首乎?" 指裵克廉也。 南誾曰: "何得使汝老腐儒知之!" 上叱誾使不復言, 待以故舊之禮, 送至中門。 後有議之者, 南在召穡子種善謂曰: "尊公發狂言, 有議之者, 不去必受禍。" 丙子夏五月, 請避暑神勒寺, 將行疾作, 旣至疾革。 有僧進欲有言, 穡擧手揮之曰: "死生之理, 吾無疑矣。" 言訖而卒。 穡天資明睿, 學問精博, 秉心寬恕, 處事詳明。 爲宰相, 務遵成憲, 不喜紛更, 勉進後學, 孜孜不倦。 爲文章, 操筆卽書, 辭意精到。 有集五十五卷行于世。 爲家不問有無費, 平生無疾言遽色, 樽俎之間, 油油然處之不及亂。 襟懷灑落, 言動從容, 久居寵利, 而不以爲喜, 再遭屯亂, 而不以爲慼。 晩年奉旨, 銘指空、懶翁二浮圖, 其徒因來往于門, 頗有佞佛之譏。 穡聞之曰: "彼謂追福君親, 予不敢拒也。" 穡三男, 長種德, 次種學, 皆官至密直, 先歿。 次種善, 今爲兵曹參議。
- 【태백산사고본】 2책 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책 91면
- 【분류】인물(人物)
- [註 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