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도에서 보고한 효자·절부 등을 정려하고 복호하게 하다.
임금이 좌·우정승에게 분부하였다.
"지금 각도에서 보고한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은 모두 실적이 있으니 마땅히 포상을 더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되, 구실[役]이 있는 자는 복호(復戶)하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구휼하여 주어 풍속을 가다듬게 하라."
급제 탁신(卓愼)은 전라도 광주(光州) 사람이다. 부친이 돌아가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제(喪制)를 마쳤으며, 그의 모친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니 한 고을에서 효성을 칭찬하였다.
전 서령(署令) 김사지(金四知)는 충청도 전의(全義) 사람이다. 노모(老母)를 봉양하기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반찬을 올리되 반드시 자기가 먼저 맛을 보며, 부모의 뜻을 순종하여 오래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주(牙州)의 학생 공도지(孔都知)는 나이 27세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가난하고 직업도 잃어 스스로 살아갈 길이 막연하므로 그 아내가 다른 고을에 옮겨 살자고 권하니, 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선영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차마 떠날 수 있는가?"
하고, 신을 삼아 팔면서 제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주(林州) 사람 임안귀(林安貴)는 부모의 상고를 당하여 8년이나 분묘를 지켰고, 청주 호장(淸州戶長) 손희(孫禧)는 무오년에 왜구가 갑자기 고을에 침입하여 모친과 아내며 누이동생까지 다 왜구에게 붙들린 바 되자, 분통해서 살기를 돌아보지 않고 바로 적중(賊中)에 들어가서 모친을 업고 산에 올라가서 죽음을 면하게 하고, 끝내 효성으로 봉양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다.
영주(寧州)의 관노(官奴) 물쇠[勿金]는 아비를 성심으로 섬기다가 아비가 돌아가자 참최(斬衰) 3년에 신주를 모셔 두고 아침저녁으로 상식했으며,
김화(金化)의 전 산원(散員) 이영기(李英奇)는 조부모와 부모가 늙고 또한 가난하였으므로 몸소 농사를 지어 효성으로 봉양하였는데 끝끝내 게을리 하지 않았고, 교동(喬桐)의 백성 방군정(方君正)은 어미를 효성으로 봉양하므로 온 동리에서 칭찬하였다.
전 부정(副正) 양희현(梁希賢)은 중국 사람이다. 강음현(江陰縣)에서 살았는데 집안이 심히 가난했으나, 늙은 모친을 봉양하는데 비록 나물 반찬에 나물국이지만 반드시 그 고을의 좋은 것으로 대접해서 효성하는 마음이 극진하였고, 그의 아내도 잘 받들어서 부도(婦道)를 잃지 않았다.
광주 호장(廣州戶長) 이적(李勣)은 군사의 날짜를 잃어버려서, 광주도 병마사(廣州道兵馬使) 조희고(趙希古)가 적(勣)을 극형에 처하고자 하니, 적의 아들 전 만호(萬戶) 이호생(李好生)이 손으로 그의 부친을 끌어안고 제몸으로 대신하려 하매, 희고가 그 효성에 감동되어 석방하여 적이 죽기를 면했으며, 그 뒤 적이 병들어 죽자 호생이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마쳤다.
수원(水原)의 생원 이조(李造)는 모친상을 당하여 무덤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아침저녁으로 죽만 먹고 소금과 장이며 나물과 과실을 먹지 않고 슬퍼하며 공경했으며, 전 별장(別將) 김계동(金桂同)도 역시 수원 사람인데, 천성이 원래 효성스럽고 공순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기를 공근히 하다가 모친이 죽으매 사당을 두고 사철의 초하루 보름에 제사를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상은 모두 효자와 순손이며, 함열(咸悅) 사람 전 산원(散員) 최득림(崔得林)의 아내 홍씨(洪氏)는 무오년에 왜적에게 잡힌 바 되어 적이 욕을 보이려 하니, 적을 꾸짖고 한사코 거절하다가 창에 찔려서 죽었고,
양성(陽城)의 고(故) 판사(判事) 전오복(全五福)의 아내 노씨(盧氏)는 정묘년에 가장이 죽자 무덤의 아래에다 여막을 짓고 지금까지 9년 동안을 제사지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춘주(春州)021) 의 낭천 감무(狼川監務) 조안평(趙安平)의 모친 이씨(李氏)는 일찍이 그의 가장을 잃고 과부로 살면서 수절하고 아들을 교양시켜 벼슬을 하게 하였다.
교동(喬桐)의 전 별장(別將) 이제(李提)의 아내 조씨(曹氏)는 나이 19세에 왜적에게 붙들려 가서 죽었으나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모두 절부이었다.
명하여 모두 그들을 복호(復戶)하고 그 자손들을 구휼해 주게 하되, 그 중에서 벼슬하기를 원하는 자는 말[馬]을 주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고, 나이 많고 집이 가난한 자와 부인들에게는 차등 있게 쌀을 내려 주고, 또 그 동구문[閭]에 정표하게 하고는 사실을 기록해서 경중과 외방에 널리 알리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82면
- 【분류】윤리(倫理) / 재정-역(役)
- [註 021]춘주(春州) : 지금의 춘천.
○丁未/上命左右政丞曰: "今各道所報孝子順孫義夫節婦, 各有實跡, 宜加褒賞, 旌表門閭。 其有役者則復之, 貧乏者則周之, 以勵風俗。" 及第卓愼, 全羅道 光州人也。 父歿, 三年衰絰終制, 奉養其母盡誠敬, 鄕黨稱孝焉。 前署令金四知, 忠淸道 全義人也。 奉養老母, 朝夕進饌, 必自親嘗, 承順致孝, 久而不怠。 牙州學生孔都知, 年二十七歲喪父, 貧乏失業, 不能自存。 其妻勸移他邑, 都知泣曰: "先墳所在, 何忍去之!" 織屨爲食, 祭享不怠。 林州人林安貴, 喪父母, 守墳八年。 淸州戶長孫禧, 歲戊午, 倭賊突入州中, 母及妻妹, 皆爲所執, 憤不顧生, 直入賊中, 負母登山, 得免於死, 終始孝養, 以盡子職。 寧州官奴勿金, 孝父以誠, 比其歿也, 斬衰三年, 作置神主, 朝夕致祭。 金化前散員李英奇, 祖父母及父母, 老且貧乏, 躬耕孝養, 終始不怠。 喬桐百姓方君正, 養母盡孝, 閭里稱之。 前副正梁希賢, 華人也。 居於江陰, 家甚貧乏, 奉養老母, 雖蔬食菜羹, 必以其鄕之樂侑之, 孝心純至。 其妻承順, 不替婦道。 廣州戶長李勣, 失於軍期, 廣州道兵馬使趙希古欲置勣極刑。 勣子前萬戶好生, 手抱其父, 欲以身代, 希古感其孝誠釋之, 勣得免。 及勣病歿, 好生服喪終制。 水原生員李造, 喪母廬墓三年, 朝夕食粥, 不進鹽醬菜菓, 以致哀敬。 前別將金桂同, 亦水原人也。 性本孝敬, 定省惟勤。 母歿置祠堂, 四時朔望, 奉祀不怠。 右皆孝子順孫也。 咸悅人前散員崔得林妻洪氏, 歲戊午, 爲倭所獲, 賊欲汚之, 罵賊固拒, 中槍而死。 陽城故判事全五福妻盧氏, 歲丁卯, 夫亡。 廬於墳墓之下, 至今九年, 祭享不怠。 春州 狼川監務趙安平母李氏, 早喪其夫, 寡居守節, 敎子從仕。 喬桐前別將李提妻曺氏, 年十九, 爲倭所獲, 死不汚賊。 皆節婦也。 命皆復其家, 存恤其子。 其中願從仕者, 令給馬上京; 年老家貧者及婦人, 賜米有差。 且令旌表其閭, 仍錄實迹, 通諭中外。
-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82면
- 【분류】윤리(倫理)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