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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1월 25일 경신 1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정도전과 정총이 《고려사》를 편찬하여 바치다. 그들에게 내린 교서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과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태조(太朝)로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7권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여 바치니, 임금이 친히 보고 정도전에게 교서(敎書)를 내리었다.

"듣건대, 임금이란 것은 〈하늘의〉 덕(德)을 대신하여 나라를 가지고, 반드시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역사를 써서 책을 만드는 것이니, 〈그것은〉 일대(一代)의 전장(典章)만 갖추자는 것이 아니라, 후세를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이 중하기 때문이다. 왕씨(王氏)의 세상을 상고해 보면, 고려라는 국호를 습용하여 능히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해[歲]를 지낸 것이 5백 년에 가깝고, 대[世]를 전한 것이 30대를 넘으매, 치란성쇠(治亂盛衰)의 자취와 선악득실(善惡得失)의 원인에 대하여 기록이 번거롭게 있으나, 또한 없어진 것도 많으니, 진실로 훌륭한 역사가에 맡기지 않았던들 어찌 완전한 책을 만들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경은 학문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의 미세한 부분까지 연구하였고, 식견은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였으며, 의논은 옛 성현의 말씀에 의거하여 바르게 하고, 시비는 반드시 사특하고 정직한 취지에 의하여 밝게 판단하여, 나를 도와서 나라를 열고 큰 공을 이루었으며, 아름다운 계책은 정치와 교화를 시행하는 데 도움이 되고, 웅장한 문장은 문물 제도를 제정할 임무를 맡길 만하며, 온순한 선비의 기상이요 늠름한 대신(大臣)의 풍도인지라, 내가 즉위할 당초부터 경에게 적당히 쓰일 학문이 있는 것을 알고 보필하는 정승의 자리에 앉히고, 또 국사(國史)를 편찬하는 관직까지 겸하게 하였더니, 과연 정치를 잘하는 여가에 훌륭한 역사책을 만들어, 첫째로 연대를 표기하고 대략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변고와 상사(常事)는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을 취사 선택하고, 〈인물의〉 포폄(褒貶)은 선현(先賢)의 〈의견에〉 얽매이지 아니하였으며, 사건은 원인과 결과를 자세히 썼으되 너무 복잡하지 않고, 문장은 간결하되 속되지 않으니 옛날의 자유(子游)003) ·자하(子夏)004) 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아도 반고(班固)005)사마천(司馬遷)006) 의 훌륭한 사필(史筆)의 풍도가 있다. 책을 펴보고 돌려보내며 가상하고 탄복함을 그치지 못하여, 은총을 내려서 편찬한 공로를 정표하는 바이다. 아아! 옛날 우사(虞史)는 요전(堯典)의 글을 지어서 직필(直筆)하였고, 은(殷)나라하후(夏后) 때의 일을 거울삼았으니, 당연히 앞에 가던 수레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제 경에게 백금(白金) 1정(錠), 구마(廐馬) 1필, 채단(綵段) 1필, 비단[絹] 1필을 하사하니 받을지어다."

정총(鄭摠)에게 교서를 내리었다.

"전대(前代)의 흥망성쇠의 자취는 반드시 뒷사람을 기다려서 역사책이 이루어지고, 후왕(後王)들의 권계(勸戒)가 되는 것은 경서와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거울삼을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왕씨(王氏)고려를 세워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한 집을 만들고, 오대(五代)007) 때부터 중국을 섬겨, 세대(世代)가 오래고 기록이 대단히 많으나, 여러 번의 난리로 인하여 없어진 것이 있어 〈사료가〉 구비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록한 사람이 하나가 아니어서, 엉성하고 주밀하며 자세하고 간략함이 같지 아니하고, 혹은 너무 길게 기록하여 시비곡직(是非曲直) 사정(邪正)을 가리기 어렵게 되었으니, 만일 일대(一代)의 실록(實錄)을 만들려면 반드시 〈재질·학문·식견의〉 삼장(三長)을 다 가진 재사(才士)라야 한다. 생각하건대, 경은 기품이 순수하고 맑으며, 학문이 깊고 풍부하며, 언사(言辭)가 간결하여 믿음직하고, 문장(文章)이 우아(優雅)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고, 비판은 근엄하고 지조가 있으며,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권도(權度)는 깨끗하고 틀림이 없는지라, 내가 개국할 때에 경의 협력에 힘을 입어, 국정(國政)을 결정하는 의정부(議政府)에 올리고 사필(史筆)을 잡는 관원을 겸하게 하였더니, 정치를 협조하는 데 힘을 쓰고 역사를 편찬하는 데 또한 전심하여, 공양 삼세(公羊三世)008) 의 일과 사마천의 편년체(編年體)의 규범에 의하여 〈고려의〉 전사(全史)를 완성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였으니, 의논이 〈송 나라 범조우(范祖禹)가 지은〉 《당감(唐鑑)》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와 같이 야비하지 아니하며, 변사(變事)나 상사(常事)에 대하여 필삭(筆削)이 정(精)하고,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일에 대하여 선악을 명시하였다. 내 마음으로 가상히 여겨 후하게 상을 주는 바이다. 아아! 비록 화려하나마 번거롭지 않고 소박하나마 속되지 않으니, 가위 현량한 사관(史官)의 재질이 있다하겠다. 다스리게 되면 반드시 흥하고 어지럽게 되면 반드시 망하는 것이니, 어찌 전대(前代)의 역사를 보지 않으랴! 이제 구마(廐馬) 1필, 백은 50냥(兩), 비단[段子] 1필, 채견(綵絹) 1필을 하사하니 받을지어다."


  •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74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역사-편사(編史) / 왕실-사급(賜給)

  • [註 003]
    자유(子游) : 공자의 제자로 문학(文學)에 뛰어났음.
  • [註 004]
    자하(子夏) : 공자의 제자로 문학(文學)에 뛰어났음.
  • [註 005]
    반고(班固) : 후한(後漢) 때의 역사가.
  • [註 006]
    사마천(司馬遷) : 한(漢)나라 때의 사가(史家).
  • [註 007]
    오대(五代) : 당말(唐末)의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
  • [註 008]
    공양 삼세(公羊三世) : 제(齊)나라 공양고(公羊高)가 지은 《공양전(公羊傳)》의 태평세(太平世)·승평세(升平世)·난세(亂世)를 말함.

○庚申/判三司事鄭道傳、政堂文學鄭摠等撰前朝《高麗史》太祖恭讓君三十七卷以進。 上親覽, 敎鄭道傳曰:

蓋聞王者代德而有國, 必命文臣, 修史以成書。 非惟備一代之典章, 抑亦重萬世之勸戒。 若稽王氏之世, 襲稱高麗之名, 能合三韓, 以爲一統。 歷歲之久, 將五百年; 傳世之多, 踰三十代。 興衰治亂之迹, 善惡得失之端, 記錄(悉)〔甚〕 繁, 殘缺亦甚。 苟非付於良史, 焉得成其全書! 惟卿學窮經史之微, 識貫古今之變。 議論之正, 皆本乎聖賢之言; 臧否之明, 必辨其忠邪之趣。 佐我開國, 有成厥功。 嘉猷可以補政敎之施, 雄筆可以托制作之任。 溫溫儒者之氣象, 嶷嶷大臣之風儀。 肆予當卽位之初, 知卿有適用之學, 俾居輔相之列, 又兼國史之官。 果能於燮理之餘, 得遂其編摩之効。 表年以首其事, 因略以致其詳。 有變有常, 去就實關於大體; 或褒或貶, 是非不繆於曩賢。 事該其本末而不至於繁, 文貴乎簡質而不至於俚。 不待之贊, 蔚有之風。 披閱已還, 嘉嘆無已。 宜致匪頒之寵, 以旌撰錄之勤。 於戲! 史作《堯典》之文, 旣已施其直筆; 鑑在夏后之世, 所當戒於前車。 今賜卿白金一錠、廐馬一匹、綵段一匹、絹一匹, 至可領也。

鄭摠曰:

前世興衰之迹, 必待後人而成書; 後王勸戒之端, 具載經史而可鑑。 粤惟王氏, 奄有高麗。 合三韓而爲一家, 自五季而事中國。 世代旣久, 記錄甚繁。 且因喪亂之屢更, 頗有殘缺而未備。 況記者非一手, 疏密詳略之不同; 或言之亦多端, 曲直邪正之難辨! 如或成一代之實錄, 必須待三長之全才。 惟卿氣醇以淸, 學邃而富。 言辭簡質而必信, 文章典雅而可傳。 皮裏《春秋》, 能謹嚴而有守; 胸中權度, 自精切而不差。 當予開國之時, 賴卿協謀之力。 爰升出政之府, 俾兼秉筆之官。 旣致力於贊襄, 亦專心於撰述。 以公羊三世之事, 法司馬編年之規。 勒成全書, 垂示來世。 議論無愧於《唐鑑》, 鄙吝不生於《漢書》。 有變有常, 筆削之精著矣; 可法可戒, 善惡之効昭然。 予心曰嘉, 賞典是厚。 於戲! 雖華不繁, 雖質不俚, 可謂有良史之才; 與治必興, 與亂必亡, 盍亦觀前代之事! 今賜卿廐馬一匹、白銀五十兩、段子一匹、綵絹一匹, 至可領也。


  •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74면
  • 【분류】
    출판-서책(書冊) / 역사-편사(編史)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