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1월 23일 무오 2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검교 판중추원사 변옥란의 졸기

검교 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변옥란(卞玉蘭)이 졸(卒)하였다. 옥란의 관향(貫鄕)은 밀양(密陽)이요, 증 찬성사(贈贊成事) 변원(卞元)의 아들이며, 감찰 어사(監察御史) 변현인(卞玄仁)의 후손이다. 관례(冠禮)하기 전에 부상(父喪)을 당하고, 복(服)을 벗은 뒤 그 어머니에게,

"서울 가서 벼슬하여 조선(祖先)의 업(業)을 계승하겠습니다."

고 하니, 모친이 아직 나이 어리다 하고 말리었으나, 굳이 청하여 갔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지정(至正) 병술년에 액정 내시백(掖庭內侍伯)이 되었고, 벼슬이 올라 예빈시 승(禮賓寺丞)이 되었으며, 경자년에 진주 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정미년 가을에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갔고, 무신년에 화령 소윤(和寧少尹)이 되었으며, 임자년에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을묘년에 선공 판사(繕工判事)로 임명되었고, 병진년에 내부 판사(內府判事)로 옮겼는데,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신원좌(辛元佐)수원 사람으로서 〈옥란의〉 포장(褒狀)을 올리게 되어 전농 판사(典農判事)로 통헌(通憲)의 계급을 받아, 얼마 안 되어 봉익(奉翊)으로 승급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가, 경신년에 또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벗은 뒤, 10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다가, 경오년에 호조 판서가 되었고, 곧 병조와 이조의 판서로 옮겼다. 임신년에 태조가 즉위하자,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호를 주고, 이듬해 검교 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를 제수하였으니, 대개 늙은 까닭이었다. 이에 이르러 집에서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나이 74세였다. 부음(訃音)이 이르자, 임금이 심히 슬퍼하여 말하였다.

"이 노인을 실직(實職) 중추원 사로 쓰려고 했더니 하는 수 없구나!"

옥란은 천품이 강명(剛明)하고 마음가짐이 어질고 인자하였으며, 고향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과 우애를 칭찬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하여 모두 업적이 훌륭하였다. 항상 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는 지성으로 해야 하고, 관직을 맡아서는 부지런해야 하며, 세도에 아부하고 재물을 모으려는 마음을 갖지 말라."

하였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랏일을 걱정하는 것은 늙도록 쇠하지 않았다. 아들은 둘이 있는데 변중량(卞仲良)변계량(卞季良)이다. 모두 급제하여 중량은 벼슬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고, 계량은 지금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74면
  • 【분류】
    인물(人物)

○檢校判中樞院事卞玉蘭卒。 玉蘭, 密陽人, 贈贊成事之子, 監察御史玄仁之後。 年未冠, 丁(內)〔外〕 憂。 服闋, 卽告于母曰: "赴京從仕, 以繼祖先。" 母以年幼止之, 固請以行。 仕前朝, 至正丙戌, 拜掖庭內侍伯, 積官至禮賓寺丞。 庚子, 判官晋州, 丁未秋, 以典法正郞, 出按全羅道, 戊申, 少尹和寧, 壬子, 爲水原府使, 乙卯, 拜繕工判事, 丙辰, 移判內府, 楊廣道按廉使。 辛元佐水原人, 褒狀轉聞, 授典農判事, 階通憲。 尋加奉翊, 出牧淸州, 庚申, 又牧忠州, 丁母憂。 服闋, 居閑十年。 庚午, 拜戶曹判書, 尋遷兵曹、吏曹兩判書。 壬申, 上卽位, 賜原從功臣之號, 癸酉, 授檢校判中樞院事, 蓋老之也。 至是, 病卒于家, 年七十四。 訃聞, 上悼甚曰: "此老, 予欲用爲實中樞, 已無及矣!" 玉蘭天資剛明, 秉心仁恕, 鄕黨稱其孝友, 歷官京外, 俱有成効。 常訓子弟: "事君當以至誠, 奉公當以克勤。 愼勿以趨勢殖貨爲意。" 其忠君憂國之志, 至老不衰。 子二, 仲良季良, 俱登科。 仲良官至右副承旨, 季良今爲藝文館提學。


  •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74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