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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24일 계해 1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판문하부사 안종원의 졸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안종원(安宗源)이 졸(卒)하였다. 종원(宗源)의 자(字)는 사청(嗣淸)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니,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의 아들이다. 젊은 나이에 과거(科擧)에 올라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044)공봉(供奉)045) 이 되었다. 관직의 임기가 차서 천직(遷職)하게 되었는데, 동료(同僚) 심동로(沈東老)가 나이 많은 이유로써 그에게 사양하여, 그로 하여금 먼저 천직하게 하니 문정공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사양은 덕의 첫째이니 우리 집안이 더욱 번창하겠구나!"

하더니, 그 후 1년 만에 곧 천직(遷職)되었다. 여러 번 옮겨 전법 정랑(典法正郞)이 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경상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 신축년에 시어사(侍御史)로 외직(外職)으로 나가 양광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키매,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播遷)하여 죽주(竹州)에 이르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 종원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능히 접대하지 못하니, 공민왕이 노하여 그를 목 베고자 하였으나, 임금에 가까이 있는 신하 유숙(柳淑)이 변명하여 구원해 줌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갑진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임명되었으나, 신돈(辛旽)이 국정(國政)을 맡으매, 자기에게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밖으로 내보내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삼았는데, 은덕(恩德)을 베푼 정사가 있었으므로 그가 간 뒤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046) 을 세워 제사지내었다. 신해년에 신돈(辛旽)이 실패되매 일으켜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하고, 좌사의(左司議)와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와서 제학(提學)이 되고,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되었으며, 또 대사헌을 겸직하게 되었다. 임술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유양(柳亮) 등 33인을 뽑았으며, 벼슬이 문하 찬성사 판삼사사(門下贊成事判三司事)까지 이르렀다. 종원은 성품이 자상(慈詳)하고 말이 적었으며, 거처하는 정자(亭子)를 칭호하여 쌍청정(雙淸亭)이라 하였다. 사람을 접대하기를 공손하게 하고, 세상의 형편대로 따라 하여 그 몸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일을 감당하는 데 서툴러 이르는 곳마다 한 일이 없었다. 건국 초기에 이르러 임금께서 고려조의 기로(耆老)인 이유로 발탁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삼았다.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 71세였다.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을 보내어 빈궁(殯宮)에 제사지내고 장사(葬事)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리었다. 아들 안중온(安仲溫)·안경량(安景良)·안경공(安景恭)은 모두 과거에 올라, 중온경량은 벼슬이 중추(中樞)에 이르고, 경공은 개국 공신에 참여하여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안경검(安景儉)은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0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044]
    검열(檢閱) : 고려 때 예문관의 정9품 벼슬.
  • [註 045]
    공봉(供奉) : 고려 때 예문관의 정7품 벼슬.
  • [註 046]
    생사당(生祠堂) :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의 선정(善政)을 찬양하는 표시로, 백성들이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때부터 받들어 제사지내는 사당.

○癸亥/判門下府事安宗源卒。 宗源嗣淸, 順興人, 僉議贊成事文貞公 之子。 早登第, 入藝文爲檢閱供奉, 秩滿當遷, 以同僚沈東老年高讓之, 使先遷。 文貞聞之, 喜曰: "讓, 德之先也。 吾家殆益昌乎!" 後一年乃遷。 累遷至典法正郞, 出爲慶尙道按廉使。 歲辛丑, 以侍御史出按楊廣道紅賊陷京, 恭愍王南遷至竹州, 吏民皆散, 宗源罔知所措, 不能供頓。 恭愍怒, 欲誅之, 賴親臣柳淑營救得免。 甲辰, 拜典法摠郞, 辛旽當國, 以不附, 出爲江陵府使, 有惠政, 去後, 民立生祠以祭。 辛亥, 敗, 起拜司憲侍史, 歷左司議、右常侍, 拜大司憲, 入密直爲提學, 陞政堂文學, 又兼大司憲。 壬戌, 知貢擧, 取柳亮等三十三人。 官至門下贊成事、判三司事。 宗源性慈祥寡言語, 號所居亭曰雙淸。 接人以恭, 能與世推移, 以全其身。 然拙於應事, 所至無所建。 至國初, 上以其前朝耆老, 擢爲判門下府事。 以病卒, 年七十一。 上輟朝三日, 遣左政丞趙浚, 祭于殯, 官庇葬事。 諡文簡。 子仲溫景良景恭, 皆登第。 仲溫景良, 官至中樞; 景恭與於開國功臣, 封興寧君: 景儉官至工曹典書。


  •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0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