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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8일 경신 2번째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동북면 함주에 환왕의 정릉비를 세우다

문하 시랑찬성사 성석린을 동북면(東北面) 함주(咸州)에 보내어 환왕(桓王)070)정릉비(定陵碑)에 글을 써서 이를 세우게 하였다. 그 비문은 이러하였다.

"임금이 즉위(卽位)한 2년 봄 정월 신미일에 신(臣) 정총(鄭摠)에게 명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으니, 조종(祖宗)의 쌓은 덕을 힘입었다. 삼가 이미 사대(四代)를 추시(追諡)하여 모두 왕작(王爵)을 올렸으니, 그대는 내 선열고(先烈考)071)정릉비(定陵碑)에 비명(碑銘)을 지어 영원한 세대(世代)에 밝게 보이게 하라.’ 하매, 신 총(摠)이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문사(文辭)의 변변치 못한 이유로써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맹씨(孟氏)072) 의 말을 살펴보건대, ‘5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일어나게 된다.’ 하였으니, 고려 왕조는 시조(始祖) 왕씨(王氏) 이후로 거의 5백 년이 되었습니다. 국운(國運)이 이미 쇠퇴(衰頹)해지자 공민왕이 후사(後嗣)가 끊어졌는데, 요망스런 중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성(姓)을 속여 왕위를 도적질하고는 주색(酒色)에 빠지고 포학하였습니다. 무진년에 그 재상(宰相) 최영(崔瑩)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움직여서 장차 천자의 국경을 범하려고 하였으니, 백성의 화(禍)가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대의(大義)에 따라 군사를 돌이켰으니, 우(禑)가 그제야 죄를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사양했습니다. 이듬해에 천자(天子)께서 이성(異姓)이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되었음을 책망하니, 전하(殿下)께서 시중(侍中)으로서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으므로, 여러 장상(將相)들과 서로 의논하여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당초 우(禑) 때로부터 정권이 권신(權臣)에게 있었으므로, 돈을 받고 벼슬을 팔며, 송사(訟事)로 인하여 뇌물을 받아 조정을 탁란(濁亂)시켰으며, 토지를 빼앗아 산야(山野)를 온통 싸고 있었으며, 기강(紀綱)이 크게 무너져서 해독이 날로 심하니,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탄식하며 밤낮으로 다스려진 세상을 생각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구폐(舊弊)를 고쳐 없애고 치도(治道)를 다시 새롭게 하여, 사전(私田)을 폐지하여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용관(冗官)073) 을 도태(淘汰)시켜 명기(名器)를 소중히 하고, 준량(俊良)을 등용시키고 완흉(頑兇)을 내쫓았으며, 무위(武威)를 떨쳐서 변방의 외구(外寇)를 물리치고, 인정(仁政)을 베풀어 백성의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기강(紀綱)을 정돈하고 예악(禮樂)을 수명(修明)하였으니,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습니다. 요(瑤)는 혼미(昏迷)한 자질로써 대체(大體)에 어두워서, 간사한 무리를 믿어 쓰고 충직(忠直)한 신하를 내쫓으며, 부녀와 환관(宦官)의 말을 듣고서 전제(田制)의 바른 것을 어지럽히고, 사친(私親)과 근신(近臣)을 임용하여 명기(名器)의 공정함을 문란시키며, 정령(政令)이 일정하지 않아서 국법(國法)을 무너뜨리고, 용도(用度)가 절차가 없어서 백성의 재물을 해롭게 하며, 여러 소인들의 차츰차츰 헐뜯는 참소를 믿고, 전하의 나라를 광복(匡復)시킨 공로는 잊고서 이에 그 재상(宰相)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늘 전하를 모함(謀陷)하였습니다. 몽주(夢周)는 그의 무리로서의 대간(臺諫)에 있는 사람을 몰래 사주(使嗾)하여, 공신(功臣)과 직언(直言)하는 사람에게 죄를 가하려고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으려는 글을 올려서, 장차 전하(殿下)에게 미치게 하려고 하여 화(禍)가 헤아리지 못할 단계에 있게 되니, 나라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홍무(洪武) 25년(1392) 7월 16일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인이 천명(天命)이 있는 바를 알고 인심의 돌아가는 바를 살펴서, 대의(大義)로써 먼저 주창하니, 백관(百官)과 부로(父老)들이 의논하지 않고서도 의견이 서로 같게 되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니, 전하께서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사오나, 여러 사람의 뜻이 더욱 견고하므로 마지 못하여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저자[市]는 가게[肆]를 변동하지 않고,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하루아침에 청명(淸明)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즉시 지중추(知中樞) 신(臣) 조반(趙胖)을 보내어 이 사실을 황제에게 주문(奏聞)하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는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고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즐거움을 즐기게 되니, 곧 상제(上帝)의 명령이다.’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추사(中樞使) 신(臣) 조임(趙琳)이 잇따라 돌아왔는데, 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고치는가? 빨리 달려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신(臣)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명(國名)을 주청(奏請)하니, 조선(朝鮮)의 국호(國號)로 내려 주고, 또 말하기를,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의 위아래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이른바 5백 년의 시기에 응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신(臣)이 삼가 선원(璿源)074) 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全州)의 명망(名望)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075) 의 십대손(十代孫)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가서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을 낳고, 시중은 복야(僕射)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는 아간(阿干) 이광희(李光禧)를 낳고, 아간은 사도(司徒) 이입전(李立全)을 낳고, 사도는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긍휴이염순(李廉順)을 낳고, 염순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승삭이충경(李充慶)을 낳고, 충경이경영(李景英)을 낳고, 경영이충민(李忠敏)을 낳고, 충민이화(李華)를 낳고, 이진유(李珍有)를 낳고, 진유이궁진(李宮進)을 낳고, 궁진은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를 낳고, 대장군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璘)을 낳고, 집주는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가서 장군(將軍) 이양무(李陽茂)를 낳고, 장군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가서 지의주(知宜州)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았는데, 뒤에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남경 오천호소(南京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으니, 곧 우리 전하의 황고조(皇高祖)입니다. 지금 목왕(穆王)으로 봉해졌으며, 능(陵) 이름은 덕릉(德陵)이라 하고, 배위(配位) 이씨(李氏)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로서, 지금 효비(孝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안릉(安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증조(皇曾祖) 휘(諱) 이행리(李行里)는 천호(千戶)를 물려 봉[襲封]했는데, 지금 익왕(翼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지릉(智陵)이라 하고, 배위(配位)는 등주(登州) 최씨(崔氏)이니, 지금 정비(貞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숙릉(淑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조(皇祖) 증 찬성사(贈贊成事) 휘(諱) 춘(春)은 지금 도왕(度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의릉(義陵)이라 하고, 배위(配位)는 문주(文州) 박씨(朴氏)이니, 경비(敬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순릉(純陵)이라 하였습니다. 황고(皇考) 영록 대부 판장작감사 삭방도 만호 증 문하 시랑(榮祿大夫判將作監事朔方道萬戶贈門下侍郞) 휘(諱) 이자춘(李子春)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을 세워 만부(萬夫)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정(至正) 경자년(1360) 4월 갑술일에 병으로 삭방도(朔方道)에서 훙(薨)하니, 연세가 46세였습니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咸州)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했는데, 지금 환왕(桓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정릉(定陵)이라 하고, 비(妃) 최씨(崔氏)는 증 판문하 영흥백(贈判門下永興伯)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니, 의비(懿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화릉(和陵)이라 하였습니다.

대대로 훈공(勳功)과 은덕(恩德)을 쌓아서 비로소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으며, 선행(善行)이 쌓여지고 경사(慶事)가 모여져서, 근원이 깊으매 덕이 후세에 전하여 성철(聖哲)을 거듭 낳아서 큰 왕업(王業)을 세우게 했으니, 하늘이 덕이 있는 이를 돌보아 도와주심이 지극하였습니다. 딸은 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壁)에게 시집갔습니다. 전하(殿下)의 배위(配位) 한씨(韓氏)는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고, 절비(節妃)라 증시(贈諡)하고 능 이름은 제릉(齊陵)이라 하였습니다. 아들 이방우(李芳雨)진안군(鎭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과(李芳果)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의(李芳毅)익안군(益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간(李芳幹)회안군(懷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원(李芳遠)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연(李芳衍)은 일찍 별세했는데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고, 딸 두 사람은 모두 어립니다. 계실(繼室)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아들 이방번(李芳蕃)무안군(撫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석(李芳碩)은 어리며, 딸은 경산 이씨(京山李氏) 제(濟)에게 시집갔는데, 흥안군(興安君)으로 봉해졌습니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복근(李福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영안군(永安君)은 증 문하 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에게 장가갔으며, 익안군(益安君)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석근(李石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회안군(懷安君)은 증 문하 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맹종(李孟宗)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이며, 정안군(靖安君)은 예문관 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에게 장가 갔으며, 무안군(撫安君)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에게 장가갔습니다.

신이 가만히 보옵건대, 제왕(帝王)이 일어날 적에 조종(祖宗)의 적루(積累)076) 가 오래고 본지(本支)077) 의 번연(蕃衍)의 많은 것이 주(周)나라와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후직(后稷)078) 으로부터 수십세(數十世)를 지내어 문왕(文王)·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왕업(王業)을 일으켰는데, 인후(仁厚)한 후비(后妃)의 덕화에 자손이 또한 인후(仁厚)하고, 후비(后妃)가 질투하지 않으므로써 자손이 많아져서, 실로 창희(蒼姬) 8백 년의 역수(曆數)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지만, 또한 선대(先代)의 인후(仁厚)한 덕이 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는 사공(司空)으로부터 환왕(桓王)079) 에 이르기까지 적선(積善)을 오래 했는데,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영명(英明)한 자질과 신무(神武)의 지략(智略)으로써 멀리 전해 온 공렬(功烈)을 계승하고 큰 경사(慶事)를 빛나게 받아 억만대(億萬代)의 한이 없는 경사(慶事)를 개시하여, 금지(金枝)080) 의 퍼짐이 이미 무성하여졌으니, 진실로 주(周)나라와 같이 융성(隆盛)하겠습니다. 이것은 그 쌓인 것이 오래 된 까닭으로 나타나는 것이 크게 되고, 심은 것이 튼튼한 까닭으로 전하는 것이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아아! 성대한 일이로다. 신 총(摠)은 절하고 손을 모아 머리를 조아려 명사(銘辭)를 올리기를 ‘실령한 오얏나무[李氏]는 근본이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습니다. 사공(司空)으로부터 대대로 덕음(德音)이 무성하더니, 길이 그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환왕(桓王)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명주(明主)081) 를 낳으시어 문득 동방을 차지하였습니다. 역수(曆數)의 돌아가는 바이니 전쟁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혁신(革新)하여 덕을 밝게 선포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말하시기를, ‘불선(不善)한 내가 천록(天祿)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이 경사(慶事)를 기른 힘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에 예전에 시행하던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왕(王)을 추시(追諡)하니,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덕행이 나타나게 되매, 그 광채가 빛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인후(仁厚)한 공성(公姓)082) 은 즉시 그 경사를 두터이 하여,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만세(萬世)까지 영구히 존속하겠습니다. 저 귀주(歸州)를 보건대, 높다란 그 언덕에 왕기(王氣)가 매우 성하니, 한이 없는 그 경사입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매, 나의 명(銘)이 과분한 칭찬이 아니옵니다. 이 비석(碑石)에 새겨서 후세의 사람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9면
  • 【분류】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왕실(王室)

  • [註 070]
    환왕(桓王) : 환조(桓祖).
  • [註 071]
    선열고(先烈考) : 공훈이 큰 돌아가신 아버지.
  • [註 072]
    맹씨(孟氏) : 맹자(孟子).
  • [註 073]
    용관(冗官) : 쓸데없는 관원.
  • [註 074]
    선원(璿源) : 왕실의 세계(世系).
  • [註 075]
    태종왕(太宗王) : 김춘추(金春秋).
  • [註 076]
    적루(積累) : 공덕(功德)이 쌓이고 또 쌓임.
  • [註 077]
    본지(本支) : 본손(本孫)과 지손(支孫).
  • [註 078]
    후직(后稷) : 주나라 선조(先祖) 기(棄).
  • [註 079]
    환왕(桓王) : 환조(桓祖).
  • [註 080]
    금지(金枝) : 왕족(王族).
  • [註 081]
    명주(明主) : 태조(太祖).
  • [註 082]
    공성(公姓) : 공손(公孫)과 같은 말. 즉 왕후(王侯)의 손자.

○遣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于東北面咸州, 書桓王 定陵碑立之。 其文曰:

上卽位之二年春正月辛未, 命臣若曰: "予以否德, 荷天休命, 肇造邦家, 惟祖宗積德是賴。 謹已追諡四代, 皆上王爵。 汝其銘我先烈考定陵碑, 昭示永世。" 臣承命祗慄, 不敢以鄙拙辭。 嘗觀孟氏之言, 曰: "五百年, 必有王者興。" 前朝自始祖王氏以來, 垂五百年, 運祚旣衰, 恭愍絶嗣。 妖僧辛旽冒姓竊位, 荒淫戾虐。 歲戊辰, 與其相崔瑩謀, 興師妄動, 將犯天子之境, 生民之禍, 靡所紀極。 維時我主上殿下, 爲右軍都統使, 仗義還師, 乃知罪, 遜位子。 越明年, 天子責以異姓爲王氏後, 殿下以侍中任國政, 與諸將相議, 立王氏之裔爲君。 初自時政在權臣, 鬻賣官獄, 濁亂朝廷, 攘奪土田, 籠絡山野, 紀綱大壞, 毒痡日甚, 民胥怨咨, 日夕思治。 及殿下作相, 革除舊弊, 更新治道。 罷私田以正經界, 汰冗官以重名器。 登崇俊良, 放竄頑兇。 奮武威以却邊寇, 施仁政以厚民業。 整頓紀度, 修明禮樂, 三韓之民, 父母愛之。 乃以昏迷, 闇於大體, 崇信姦回, 廢黜忠直。 聽婦寺而亂田制之正, 任私昵而紊名器之公。 政令無常, 以壞國法, 用度無節, 以傷民財。 信群小浸潤之譖, 忘殿下匡復之功, 乃與其相鄭夢周, 常謀陷之。 夢周陰嗾其黨之在臺諫者, 欲加罪功臣及直言者, 羅織上書, 將及殿下, 禍在不測, 國人莫不憤怨。 洪武二十五年七月十六日, 左侍中裵克廉、右侍中趙浚等五十二人, 知天命之所在, 察人心之所歸, 倡以大義, 百官父老, 不謀而同, 合辭勸進。 殿下讓至再三, 衆志彌固, 勉卽寶位。 市不易肆, 兵不血刃, 會朝淸明, 民乃大悅。 卽遣知中樞臣趙胖奏聞, 帝乃詔曰: "三韓之民, 旣尊李氏, 民無兵禍, 人各樂天之樂, 迺帝命也。" 未幾, 中樞使臣趙琳繼還, 又勅: "國更何號, 星馳來報。" 卽令藝文學士臣韓尙質, 奏請國名, 賜以朝鮮之號, 且曰: "體天牧民, 永昌後嗣。" 其獲天人上下之助如此, 誠所謂應五百年而興者也。 臣謹按璿源所自, 之望族。 有司空諱, 仕新羅, 娶太宗王十世孫軍尹金殷義之女, 生侍中自延。 侍中生僕射天祥, 僕射生阿干光禧, 阿干生司徒立全, 司徒生兢休, 兢休廉順, 廉順承朔, 承朔充慶, 充慶景英, 景英忠敏, 忠敏, 珍有, 珍有宮進, 宮進生大將軍勇夫, 大將軍生內侍執奏。 執奏娶侍中文克謙之女, 生將軍陽茂, 將軍娶上將軍公諱康濟之女, 生知宜州安社。 後仕朝, 爲南京五千戶所達魯花赤, 卽我殿下皇高祖。 今封穆王, 陵號曰。 配李氏, 千牛長史諱公肅之女。 今封孝妃, 陵號曰。 皇曾祖諱行里, 襲封千戶, 今封翼王, 陵號曰。 配登州 崔氏, 今封貞妃, 陵號曰。 皇祖贈贊成事諱椿, 今封度王, 陵曰義陵。 配文州 朴氏, 封敬妃, 陵曰純陵。 皇考榮祿大夫判將作監事朔方道萬戶、贈門下侍中諱子春, 屢立邊功, 以長萬夫。 至正庚子四月甲戌, 病薨于朔方道, 年四十六。 其年八月丙申, 葬于咸州之東歸州之原。 今封桓王, 陵曰定陵。 妃崔氏, 贈判門下永興伯 靖孝公閑奇之女, 封懿妃, 陵曰和陵。 世積勳德, 肇基王迹, 積善鍾慶。 源遠流光, 篤生聖哲, 以建大業, 天之眷佑有德至矣。 女適三司左使趙仁璧。 殿下配韓氏, 贈領門下府事諱之女, 先薨, 贈節妃, 陵曰齊陵。 生男曰芳雨, 封鎭安君, 【上王諱。】 ,永安君, 曰芳毅, 益安君, 曰芳幹, 懷安君, 曰 【今殿下諱。】 靖安君, 曰芳衍, 早歿, 贈元尹。 女二, 皆幼。 繼室康氏, 判三司事諱允成之女, 封顯妃。 生男曰芳蕃, 撫安君, 曰芳碩, 幼。 女適京山 李氏濟, 封興安君鎭安娶贊成事池奫之女, 生男曰福根, 元尹。 永安娶贈門下左侍中金天瑞之女。 益安娶贈門下贊成事崔仁㺶之女, 生男曰石根, 元尹。 懷安娶贈門下贊成事閔璿之女, 生男曰孟宗, 元尹。 靖安娶藝文館大學士閔霽之女, 撫安歸義君 王瑀之女。 臣竊觀帝王之興, 祖宗積累之遠, 本支蕃衍之多, 未有若家者也。 爰自后稷, 歷數十世, 以至而興王業。 振振麟趾, 詵詵螽斯, 實基蒼姬八百年之曆, 亦有先世仁厚之德以致之也。 今我國家, 自司空至于桓王, 積善悠久, 而我殿下以英明之資、神武之略, 遠紹遺烈, 光膺大慶, 以開億萬世無疆之休, 金枝之衍, 旣蕃且茂, 誠與家竝隆。 是其積之者久, 故發之者大; 樹之者固, 故傳之者遠。 於戲盛哉! 臣拜手稽首獻銘曰: 於皇仙, 本固根深。 粤自司空, 世茂德音。 長發其祥, 至于桓王。 誕我明主, 奄有東方。 曆數攸歸, 不試戎衣。 與民更始, 昭布德輝。 王曰不穀, 獲膺天祿。 是繇祖宗, 毓慶之力。 迺稽舊章, 追諡以王。 潛德昭著, 不顯其光。 振振公姓, 卽篤其慶。 維本維支, 萬世有永。 瞻彼歸州, 有峙其丘。 王氣鬱葱, 無疆惟休。 臣拜稽首, 我銘不諛。 刻此貞珉, 以示後人。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9면
  • 【분류】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