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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1권, 총서 66번째기사

태조가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니 한산군 이색 등이 시를 지어 치하하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033) 에 들어와 침구(侵寇)하여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쌀이 땅에 버려진 것이 두껍기가 한 자 정도이며, 포로한 자녀(子女)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서 지나간 곳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2, 3세 되는 계집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腹]를 쪼개어 깨끗이 씻어서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내니, 삼도(三道) 연해(沿海)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의 침구(侵寇)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우왕태조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3도(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가서 왜적을 정벌하게 하고,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부장(副將)으로 하게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평리 우인열(禹仁烈)·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敷)·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아 모두 태조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군대가 나가서 장단(長湍)에 이르렀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싸움을 이길 징조입니다."

하였다. 왜적상주(尙州)에 들어와서 6일 동안 주연(酒宴)을 베풀고 부고(府庫)를 불살랐다. 경산부(京山府)034) 를 지나서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니, 삼도 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9원수가 패전하고,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2원수가 전사(戰死)하니, 사졸(士卒)로서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성하여 마침내 함양성(咸陽城)을 도륙(屠戮)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치고서, 장차 광주(光州)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성언(聲言)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태조가 천리(千里) 사이에 넘어진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음을 보고는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편안히 잠 자고 밥 먹지 못하였다. 태조안열(安烈) 등과 함께 남원(南原)에 이르니 적군과 서로 떨어지기가 1백 20리(里)였다. 극렴(克廉) 등이 와서 길에서 태조를 뵙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가 하루 동안 말을 휴식시키고는 그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군이 험지(險地)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려 싸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부서(部署)를 정하여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하고 동(東)으로 갔다. 운봉(雲峰)을 넘으니 적군과 떨어지기가 수십 리(里)였다. 황산(黃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서 태조가 큰길 오른쪽의 소로(小路)를 보고서 말하기를,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하면서, 마침내 자기가 빨리 갔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함을 바라보고서는 싸우지 않고 물러갔으니, 이때 해가 벌써 기울었다. 태조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갔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과연 돌출(突出)하는지라, 태조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유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쏘았는데, 50여 개를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었으되, 시윗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무릇 세 번이나 만났는데 힘을 다하여 최후까지 싸워 이를 죽였다. 땅이 또 진창이 되어 적군과 우리 군사가 함께 빠져 서로 넘어졌으나, 뒤미처 나오자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이에 적군이 산을 의거하여 스스로 방어하므로, 태조는 사졸들을 지휘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분거(分據)하고, 휘하의 이대중(李大中)·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하였다. 태조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衝突)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내려왔다.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태조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螺]를 불어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賊陣)에 부딪쳤다. 적의 장수가 창을 가지고 바로 태조의 후면(後面)으로 달려와서 심히 위급하니,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뛰게 하여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하였다.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여, 두란이 드디어 적장을 쏘아 죽였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를 맞혔다. 태조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기세가 더욱 용감하여, 싸우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사들은 태조의 상처 입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군이 또 태조의 앞에 부딪치므로 태조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좌우에게 지휘하기를,

"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

하니, 장수와 군사가 감동 격려되어 용기백배로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군이 나무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 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말을 1천 6백여 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하였다. 태조는 말하기를,

"적군의 용감한 사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

하면서, 마침내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이내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적군을 공격한다면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될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나희(儺戱)를 베풀고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적군의 머리[首級]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러 장수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면서 살려주기를 원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군의 진중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아기발도(阿其拔都)태조의 진을 설치함이 정제(整齊)한 것을 바라보고는 그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아기발도가 그 섬[島]에 있으면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러 적군이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에 복종하여 굳이 청하여 왔으므로, 여러 적의 괴수들이 매양 진현(進見)할 적마다 반드시 빨리 앞으로 나아가서 꿇어앉았으며, 군중(軍中)의 호령을 모두 그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번 행군(行軍)에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써 바꾸고자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대나무가 일반 나무보다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가 편리하겠지만, 그러나 대나무는 또한 민가(民家)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니, 그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간다면 족(足)할 것이다."

하였다. 태조는 이르는 곳마다 민간의 물건은 털끝만한 것도 범(犯)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올라(兀羅)의 전쟁에 태조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으므로 처명이 은혜에 감동하여 매양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보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종신토록 태조의 곁을 따라다니며 모시었다. 이 싸움에서 처명태조의 말 앞[馬前]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우니, 이때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조가 승전(勝戰)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오니, 판삼사(判三司) 최영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채붕(綵棚)과 잡희(雜戲)를 베풀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나아가서 재배(再拜)하니, 최영도 또한 재배하고 앞으로 나아와서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公)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謝禮)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을 이긴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의 세력은 이미 꺾였사오니 혹시 만약에 다시 덤빈다면 내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 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우왕이 금(金) 50냥을 내려 주니 태조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장수가 적군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인데, 신(臣)이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 치하(致賀)하기를,

"적의 용장 죽이기를 썩은 나무 꺾듯이 하니,

삼한의 좋은 기상이 공에게 맡겨졌네.

충성은 백일(白日)처럼 빛나매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위엄은 청구(靑丘)035) 에 떨치매 바다에 바람이 없도다.

출목연(出牧筵)036) 의 잔치에서는 무열(武烈)을 노래하고,

능연각(凌煙閣)의 집에서는 영웅을 그리도다.

병든 몸 교외 영접 참가하지 못하고,

신시(新詩)를 지어 읊어 큰 공을 기리네."

하였다. 전 삼사 좌사(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은 이를 화답하기를,

"적의 기세 꺾기를 우레처럼 하니,

군사의 지휘가 모두 공(公)에게서 나왔네.

상서로운 안개 퍼져 나가 독한 안개를 없애고,

서리 바람 매서워서 위엄 바람 도왔도다.

섬 오랑캐 간담이 떨어지매 군용(軍容)이 성대하고,

이웃나라가 마음이 선뜩하매 사기(士氣)가 웅장하네.

온 나라 의관(衣冠)이 다투어 배하(拜賀)하니,

삼한 만세에 태평의 공이네."

라 하였다. 성균 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이 이를 화답하기를,

"3천 신하037) 마음과 덕이 모두 다 같은데,

군율(軍律)은 지금에 와서 모두 공에게 있도다.

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

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

동궁(彤弓)은 빛나서 은영(恩榮)이 무겁고,

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

한번 개선(凱旋)하매 종사(宗社)가 안정되니,

마상(馬上)에서 기공(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7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외교(外交) / 역사(歷史)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33]
    하삼도(下三道) : 충청·전라·경상도.
  • [註 034]
    경산부(京山府) : 성주(星州).
  • [註 035]
    청구(靑丘) : 조선.
  • [註 036]
    출목연(出牧筵) : 당 태종(唐太宗)이 그의 공신(功臣)의 초상을 그려서 걸어 놓은 전각(殿閣).
  • [註 037]
    신하 :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신하 3천 명을 이름.

〔○〕辛禑六年庚申八月, 倭賊五百艘, 維舶於鎭浦, 入寇下三道, 屠燒沿海州郡殆盡, 殺虜人民, 不可勝數, 屍蔽山野。 轉穀于其舶, 米棄地厚尺, 斫所俘子女山積, 所過波血。 掠得二三歲女兒, 剃髮剖腹淨洗, 兼奠米酒祭天。 三道沿海之地, 蕭然一空, 自有患, 未有如此之比。 太祖楊廣全羅慶尙三道都巡察使, 往征之, 贊成事邊安烈爲都體察使以副之。 評理王福命、評理禹仁烈、右使都吉敷、知門下朴林宗、商議洪仁桂、密直林成味陟山君 李元桂爲元帥, 皆受太祖節度。 師出至長湍, 白虹貫日, 占者曰: "戰勝之兆。" 尙州, 置酒六日, 燔府庫, 經京山府, 駐沙斤乃驛。 三道元帥裵克廉等九元帥敗績, 朴修敬裵彦二元帥死之, 士卒死者五百餘人。 賊勢益熾, 遂屠咸陽城, 向南原, 焚雲峯縣, 屯引月驛, 聲言: "將穀馬于金城, 北上。" 中外大震。 太祖見千里之間, 僵屍相接, 爲之惻然, 不能寢食。 太祖安烈等, 至南原, 距賊百二十里, 克廉等來謁于道, 莫不懽悅。 太祖休馬一日, 將以厥明戰, 諸將咸曰: "賊負險, 不若(徙)〔待〕其出與戰。" 太祖慨然曰: "興師敵愾, 猶恐不見賊。 今遇賊不擊可乎!" 遂部署諸軍, 詰朝誓而東, 踰雲峯, 距賊數十里, 至黃山西北, 登鼎山峯太祖見道右險徑曰: "賊必出此, 襲我後矣, 我當趨之。" 遂自趨之。 諸將皆由坦途進, 望見賊鋒銳甚, 不戰而却, 時日已昃矣。 太祖旣入險, 賊奇銳果突出, 太祖以大羽箭二十射之, 繼以柳葉箭射之, 五十餘發, 皆中其面, 莫不應弦而斃。 凡三遇鏖戰殲之。 地又泥濘, 彼我俱陷, 相顚仆。 及出, 死者皆賊, 我軍不傷一人。 於是賊據山自固, 太祖指揮士卒, 分據要害, 使麾下李大中禹臣忠李得桓李天奇元英守吳一徐彦陳中奇徐金光周元義尹尙俊安升俊等挑之, 太祖仰攻之。 賊出死力, 臨高衝突, 我軍分北而下。 太祖顧謂將士曰: "堅控轡, 勿使馬蹶。" 旣而, 太祖復使吹螺整兵, 蟻附而上, 衝賊陣。 有賊將引槊直趨太祖後甚急, 偏將李豆蘭躍馬大呼: "令公視後! 令公視後!" 太祖未及見, 豆蘭遂射殪之。 太祖馬中矢而仆, 易乘, 又中仆, 又易乘。 飛矢中太祖左脚, 太祖抽矢, 氣益壯戰益急, 軍士莫知太祖傷。 賊圍太祖數重, 太祖與數騎, 突圍而出, 賊又衝突太祖前, 太祖立殪八人, 賊不敢前。 太祖誓指天日, 麾左右曰: "怯者退, 我且死賊!" 將士感厲, 勇氣百倍, 人人殊死戰, 賊植立不動。 有一賊將年纔十五六, 骨貌端麗, 驍勇無比。 乘白馬, 舞槊馳突, 所向披靡, 莫敢當。 我軍稱阿其拔都, 爭避之。 太祖惜其勇銳, 命豆蘭生擒之。 豆蘭曰: "若欲生擒, 必傷人。" 阿其拔都著甲胄, 護項面甲, 無隙可射。 太祖曰: "我射兜鍪頂子令脫, 汝便射之。" 遂躍馬射之, 正中頂子, 兜鍪纓絶而側, 其人急整之。 太祖卽射之, 又中頂子, 兜鍪遂落, 豆蘭便射殺之。 於是賊挫氣。 太祖挺身奮擊, 賊衆披靡, 銳鋒盡斃。 賊痛哭, 聲如萬牛, 棄馬登山。 官軍乘勝馳上山, 歡呼皷譟, 震天地, 四面崩之, 遂大破之。 川流盡赤, 六七日色不變, 人不得飮, 皆盛器候澄, 久乃得飮。 獲馬一千六百餘匹, 兵仗無算。 初賊十倍於我, 唯七十餘人, 奔智異山太祖曰: "賊之勇者, 殆盡矣。 天下未有殲敵之國。" 遂不窮追。 因笑謂諸將曰: "擊賊固當如是。" 諸將咸服之。 退而大作軍樂, 陳儺戱, 軍士皆呼萬歲, 獻首級山積。 諸將懼治不戰之罪, 叩頭流血乞生, 太祖曰: "在朝廷處分。" 時被擄者自賊中還, 言: "阿其拔都望見太祖置陣整齊, 謂其衆曰: ‘觀此兵勢, 殊非往日諸將之比。 今日之事, 爾輩宜各愼之。’" 初阿其拔都在其島欲不來, 衆賊服其勇銳, 固請而來。 諸賊酋每進見, 必趨跪, 軍中號令, 悉主之。 是行也, 軍士帳幕柱, 皆欲易以竹, 太祖謂曰: "竹輕於木, 便於致遠, 然亦民家所植也, 且非吾裝齎舊物, 不失舊物而還足矣。" 太祖所至, 不犯秋毫, 皆類此。 兀羅之役, 太祖處明不殺, 處明感恩, 每見矢痕, 必嗚咽流涕, 終身隨侍左右。 是戰也, 處明居馬前, 力戰立功, 時人稱之。 太祖振旅而還, 判三司崔瑩率百官, 設綵棚雜戲, 班迎東郊天壽寺前。 太祖望見下馬, 趨進再拜, 亦再拜, 前執太祖手揮涕曰: "非公, 孰能爾耶?" 太祖頓首謝曰: "謹奉明公指揮, 幸而得捷。 予何功焉? 此賊勢已挫矣, 儻若復肆, 吾當受責。" 曰: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太祖讓不敢當。 賜金五十兩, 太祖辭曰: "將帥殺賊, 職耳。 臣何敢受!" 韓山君 李穡作詩致賀曰:

掃賊眞將拉朽同, 三韓喜氣屬諸公。 忠懸白日天收霧, 威振靑丘海不風。 出牧華筵歌武烈, 凌煙高閣畫英雄。 病餘不得參郊迓, 坐詠新詩頌雋功。

前三司左使金九容和之曰:

賊鋒摧挫與雷同, 節制無非自我公。 瑞霧葱葱銷毒霧, 霜風洌洌助威風。 島夷墜膽軍容盛, 隣境寒心士氣雄。 滿國衣冠爭拜賀, 三韓萬世太平功。

成均祭酒權近和之曰:

三千心與德皆同, 師律如今盡在公。 許國忠誠明貫日, 摧鋒勇烈澟生風。 彤弓赫赫恩榮重, 白羽巍巍氣勢雄。 一自凱旋宗社定, 須知馬上有奇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7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 외교(外交) / 역사(歷史)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