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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54권, 정조 24년 4월 12일 甲午 3번째기사 1800년 청 가경(嘉慶) 5년

유생 김종진 등이 성삼문·유응부·이개·유성원·이보흠의 제사를 보존하고 이종검.이지활의 절의를 표창해 달라고 상소하다

경외(京外)의 유생 김종진(金鍾眞) 등이 상소하기를,

"지난 단묘조(端廟朝)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등은 세상에서 말하는 육신(六臣)으로서, 이들은 곧 우리 나라의 백이(伯夷)·숙제(叔齊)이자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孺) 경청(景淸)076) 입니다. 이 때문에 세조 대왕께서 이미 만고 충신으로 인정하셨고 그후 열성조(列聖朝)에서 불쌍히 여겨 억울함을 풀어주며 그 충성을 포상하고 세상에 드러내 주신 조치가 조금도 유감이 없으며, 그 무덤과 사우를 이미 조정에서 조성해 주고 수축한 일이 있었으니, 그 자손들이 받들어 높이고 영원토록 제향을 드릴 필요는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끊긴 자손을 이어주고 없어진 집안을 보존하여 그 충혼 기백으로 하여금 각기 의지하여 붙여 있을 곳이 있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성조(聖朝)의 은전이 아직 거기까지 손을 쓰지 못해 뜻있는 선비들의 장탄식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 저 육신의 정성을 다한 충성과 큰 절의는 실로 하등의 차이가 없는데 박팽년의 한 가닥 핏줄은 다행히 끊기지 않았고 근래에 또 번창하고 있으니, 하늘이 복을 남긴 이치를 족히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저 오신(五臣) 집안의 혈통이 끊겨 후사가 없는 것은 실로 천지간에 유감이자 백대의 가슴아픈 일입니다.

과거 숙묘(肅廟)을유년077) 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경연에서 건의하기를 ‘하위지는 체포되어 가는 날 죽은 뒤의 일을 그의 조카 원(源)에게 부탁하였으니, 을사 명신(乙巳名臣) 김저(金䃴)에 대해 양자를 들여세운 사례에 따라 의 후손으로 하여금 그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하니, 숙묘께서 하교하기를 ‘육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니 어찌 끊긴 후사를 이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특별히 시행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위지는 비로소 그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 생겼으나 ···의 집들만은 그와 똑같이 끊긴 자손을 이어주는 은전을 입지 못했는데, 사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현묘조(顯廟朝)에 어떤 서리가 인왕산(仁王山) 밑에서 성삼문의 신주를 주웠는데 글자가 너무도 뚜렷하여 그 당시 선비들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게 달려가 의논하였더니, 선정은 말하기를 ‘지금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수백 년이 지났으니, 예법으로 보면 제사를 지내는 대수가 다 되어 마땅히 땅에 묻어야 할 일이나 선생의 절의는 백대를 내려가면서 제사를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또 한편, 하늘이 이미 일깨워주었는데, 사람이 또 그것을 묻는다는 것은 어찌 차마 그럴 수 있는 일인가.’ 하고, 신(神)이 집안으로 돌아오는 예법에 따라 노은동(魯恩洞) 옛집에 도로 모시게 하였다 합니다. 아, 신주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하늘의 뜻이 그 제사를 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텅 빈 집의 신주가 오늘날까지도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하늘의 뜻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육신이 절의를 위해 몸을 바칠 당시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이란 자가 있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집현전 박사로 뽑혀 성삼문 등과 함께 《역대통감(歷代通鑑)》을 편찬하여 이미 의기가 서로 맞았고 마침내는 함께 절의를 세웠습니다. 그 절의를 위해 죽은 내용은 장릉지(莊陵誌) 안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후사가 없이 제사가 끊긴 것 또한 저 사신(四臣)과 마찬가지이니, 지금 후사를 들여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는 일에 모두 똑같은 은례(恩禮)를 베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故) 제학(提學) 이종검(李宗儉)보흠의 종형(從兄)이자 유성원(柳誠源)의 내종(內從)입니다. 일찍이 단묘(端廟)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 궁료(宮僚)로 있었는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다는 소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 문종 대왕께서 당호(堂號)를 효우(孝友)라 지어 주셨고 고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시에 ‘성상께서 지은 당호 절실하고요 동궁의 깨우친 도 깊기도 하다.[聖上名堂切 儲宮造道深]’ 하였으니 이는 다 실지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보흠과 동방 급제한 처지에다 또 그와 뜻을 함께하여 광묘(光廟)께서 왕위를 물려받자 세상에서 자취를 거두어 마음내키는 대로 살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미련없이 떠난 그 절의는 《용인읍지(龍仁邑誌)》 및 고 찬성(贊成) 유희춘(柳希春)의 글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그가 비록 보흠과는 미처 동시에 순절하지 못했지만 절의를 잡아 스스로 지켜 여느 사람과 달리 뛰어난 점에 있어서는 참으로 이른바 난형난제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림이 추앙하여 지방 고을에서 나란히 제향을 드리고 있으니, 이 또한 백대의 공론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또 감무(監務) 이지활(李智活)이란 자가 있었는데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8세에 운봉 현감(雲峰縣監)으로 나갔다가 을해년078) 에 이르러 한숨을 쉬며 한탄하기를 ‘옛날 박유(朴儒)는 나와 뜻이 같은 선비였다.’ 하고, 마침내 거창(居昌) 박유산(朴儒山)으로 들어가 제문을 지어 박유에게 제사를 드린 뒤에 누대를 지어 망월정(望月亭)이라 이름을 붙이고 매일 아침저녁 북녘을 바라보며 절을 하였습니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밤마다 그리움에 밤깊은 줄 모르는데 동녘에 떠 지새는 달 두 고을 마음 이런가 지금 이때 사무친 원한 알아주는 사람 없어 외로운 산정 속에 눈물 절로 흐른다오.[夜夜相思到夜深 東來殘月兩鄕心 此時冤恨無人解 孤寄山亭淚不禁]’ 하였는데, 그것은 영월에 계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입니다. 정축년 10월 이후로는 부모를 잃은 듯 안절부절 못하여 항상 술병을 들고 박유산 꼭대기에 올라가 해가 지도록 통곡하고 돌아오곤 하며 종신토록 지조를 지켰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학문이 깊고 도가 높아 오류 선생(五柳先生)079) 의 기풍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 두 신하의 절의 또한 세상을 깨우치고 풍속을 바로잡기에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다만 조정의 기휘(忌諱)로 인해 서로 맞지 않아 아직까지 이름이 묻혀 세상에 전한 것이 없으니, 어찌 사림이 한탄하고 애석해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성삼문·유응부·이개·유성원이보흠 등 제사가 끊긴 오신(五臣)은 반드시 제사를 보존하여 그들의 넋으로 하여금 의지할 곳이 있게 해 주시고, 이종검·이지활 등 이름이 묻힌 자에 대해서는 그 절의를 표창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하소서."

하였는데, 그 상소의 내용을 해조에 내려 대신과 의논한 뒤에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56면
  • 【분류】
    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註 076]
    방효유(方孝孺)경청(景淸) : 방효유는 절강(浙江) 영해(寧海) 사람으로 자는 희직(希直)이고, 경청은 진녕(眞寧) 사람이다. 명 태조(明太祖)의 넷째 아들 연왕 체(燕王棣)가 그의 조카 공민제(恭閔帝)를 무력으로 없애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자,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 방효유와 어사 대부(御史大夫) 경청이 그에 불복하여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우리 나라 단종조의 사육신의 경우가 그와 같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명사(明史)》 권141 방효유전(方孝孺傳), 경청전(景淸傳).
  • [註 077]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 [註 078]
    을해년 : 1455 세조 1년.
  • [註 079]
    오류 선생(五柳先生) :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별호.

○京外儒生金鍾眞等上疏曰:

"粤在端廟朝, 有若忠正公 朴彭年忠文公 成三問忠烈公 河緯地忠穆公 兪應孚忠簡公 李塏忠景公 柳誠源, 世所稱六臣也, 此六臣, 卽我國之, 皇朝之也。 是以世祖大王已許以萬古忠臣, 其後列聖朝所以隱恤而伸暴之, 旋褒而表章之者, 至矣盡矣。 其墳墓院宇, 旣有朝家封植修建之節, 則若無待於其子孫之崇奉永享者。 然, 至於繼絶存亡, 使其忠魂毅魄, 各有所依歸者, 則聖朝之恩典, 尙有所未遑, 而志士之永慨, 尙有所壹鬱者也。 噫! 彼六臣之精忠大節, 實無異同, 而止彭年之一縷血屬, 幸而不絶, 近又蕃昌, 則足可見仁天不食之理。 而惟彼五臣家之滅絶無後, 實爲天地之有憾, 百世之傷痛也。 在昔肅廟乙酉, 禮曹判書閔鎭厚建白筵中以爲 ‘河緯地被逮之日, 以後事, 托於其從子, 請依乙巳名臣金䃴立後例, 以之後孫, 俾奉其祀。’ (復)肅廟下敎曰: ‘六臣與他自別, 何可不爲繼絶乎? 依所達特施。’ 於是河緯地始有主祀之孫, 至於之家, 獨未蒙一例繼存之典者, 誠未知何爲而然也。 嘗聞顯廟朝, 有一吏胥, 得成三問木主於仁王山下, 粉字丁寧, 其時章甫, 走議於先正臣宋時烈, 則先正以爲: ‘今去先生之世, 已數百歲矣, 以禮則親盡當祧, 而先生之節, 當百世祀之。 夫天旣啓之, 人又埋之, 則豈其所忍哉?’ 因令依神返室堂之禮, 還安於魯恩洞舊第。 噫! 木主之復顯, 可見天意之不廢其祀也。 然而虛堂木主, 至今無依, 則烏在其天意之不偶也耶? 六臣就義時, 有曰忠壯公 李甫欽者, 登第初被選集賢殿博士, 與成三問等, 共撰《歷代通鑑》, 已有志氣之相契, 終致節義之同歸。 其殉義顚末, 詳載於《莊陵誌》中, 其無後絶祀, 又與彼四臣者同焉, 則今於存祀之典, 不可不幷施一體之恩禮也。 故提學李宗儉, 卽甫欽之從兄也, 柳誠源之內從也。 嘗於端廟在春邸時爲宮僚, 以孝友登聞, 文宗大王賜堂號孝友, 故大提學卞季良詩曰: ‘聖上名堂切, 儲宮造道深。’ 蓋實蹟也。 與甫欽同榜登第, 又與之同志, 當光廟受禪之際, 屛跡自放, 終身不仕。 其遠蹈邁往之節, 昭載《龍仁邑誌》, 及故贊成柳希春之文。 雖未及與甫欽同時殉節, 而至於秉義自守, 卓然有立者, 則眞所謂難兄難弟矣。 故士林追仰幷侑鄕社, 亦可見百世之公議也。 其時又有監務李智活者, 十四中司馬, 十八出宰雲峰, 及夫乙亥, 喟然歎曰: ‘古之朴儒, 與我同志之士也。’ 遂入居昌 朴儒山中, 操文祭朴儒, 手自築臺, 名曰‘望月亭’, 每朝夕, 北望瞻拜。 嘗有詩曰: ‘夜夜相思到夜深, 東來殘月兩鄕心。 此時冤恨無人解, 孤寄山亭淚不禁。’ 蓋寓寧越戀君之意也。 自丁丑十月以後, 皇皇如喪, 每携酒獨登朴儒山頂, 竟日痛哭而返, 仍終身自靖, 世稱學邃道隆, 有五柳風焉。 此兩臣之節義, 亦足以警世礪俗, 而只以忌諱互錯, 尙此泯沒無傳, 玆豈非士林之所嗟惜者乎? 請成三問兪應孚李塏柳誠源李甫欽五臣之絶祀者, 必存祀, 而使之依歸焉, 李宗儉李智活兩臣之泯沒者, 則旋褒而使之表著焉。"

命疏辭, 下該曹, 議于大臣稟處。


  •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256면
  • 【분류】
    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